어느 식품 매장에서 새로운 상표의 고급 잼들을 전시 판매를 했다. 신상품인 만큼, 견본을 열어 놓아 조금씩 맛을 보고
고를 수 있게 했다. 또 한 병 당 1달러씩을 할인해 주는 쿠폰도 주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은 심리 실험이었다. 실험은 두 곳의 매장에서
실시되었다. 두 점포의 차이는 단 한 가지였다. 한 곳은 6 종류의 제품을 전시했고, 다른 한 곳은 24 종류의 제품을 전시를 했다. 어느 쪽이
더 많이 팔렸을까? 6 종류의 잼의 경우 쿠폰 회수율은 30%였다. 24 종류를 늘어놓은 매장에서는 3%였다!
스물 넷이라면 맛을
보고 비교하기에는 너무 많을까? 비교하다 지쳐서? 그렇다면 하나 대 둘은 어떨까? 설문지 작성자에게 사은품을 주는 실험이 있었다. 수고비로 현금
1달러 50센트를 받아가든지, 2달러 짜리 펜을 받아가든지 선택하게 했다. 그랬더니 참가자의 75%가 펜을 선택했다. 이번에는 1.5 달러의
현금, 2달러 짜리 펜 한 자루, 1달러 짜리 펜 2 자루로 선택의 폭을 늘렸다. 어떻게 되었을까? 펜을 선택하는 경우는 50%로 줄고, 현금을
그냥 받아 가는 경우가 늘어났다.
선택이 많아지면 사람들이 오히려 선택 자체를 포기하게 되는 경향은 왜 생기는 것일까? 위의
사례들은 배리슈워츠라는 사회행동학 교수가 쓴 "The Paradox of Choice"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저자는 이렇게 설명을
한다. A, B 두 개 중에 A를 선택했다고 하자. B는 애당초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A의 비용과 A의 가치를 비교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그렇게 합리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B를 얻을 수 있었는데 얻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즉 애당초 가지지
않았던 B를 마치 가졌다가 잃은 것처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머리는 A의 비용은 가격표의 가격임을 안다. 하지만 마음은 B를 잃은 손실과 A에
지불하는 비용을 합쳐 총 비용으로 느낀다. A는 당연히 비용 대 가치가 낮게 느껴진다. 이는 반대로 B를 선택해도 마찬가지다. 결국 A, B
모두 비용에 비해 가치가 낮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슈워츠의 책의 내용은 주로 개인적인 삶의 자세에 맞춰져 있다. 너무 완벽한
선택을 하려고 아둥바둥대지 말라는 것이다. 선택은 선택에 들어가는 노력, 비교된 다른 것들에서 얻어지는 손해 본 듯 한 감정들을 대가로 한다.
그 지불이 너무 크면 사람을 피곤하고, 우울하고, 불행하게 만든다. 그러니 적당한 선을 정해서 그 선을 넘는 것이 보이면 바로 선택하라는
것이다. 더 좋은 것을 찾지 말고 만족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 아주 의미
있는 내용이다. 이 내용만으로도 한 번은 읽어 볼만한 책이다. 우리나라에는 "선택의 심리학"이라는 제목으로 웅진 지식하우스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한 번씩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런데 내가 이 책 이야기를 꺼낸 다른 이유가 있다. 단순히 개인의 삶의 문제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택의 심리학은 공급자 입장에서도 많은 생각거리를 준다. 정치 역시 정치가라는 공급자와 유권자라는 소비자 사이의 관계이다.
선택의 심리학은 정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민주 정부가 인기가 없는 이유, 노무현 정권이 무능한 정권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된
과정의 상당한 부분이 이 관점에서 설명이 된다.
선택의 심리학은 "사람은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바라면서도 다양한 선택을 피곤해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설명한다. 선택의 기회의 다양한 사회일수록 우울증의 빈도는 늘어난다는 통계가 있다. 나의 선택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반추,
회의, 반성, 고민... 이런 것들이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편하게 느끼는 것은 강제받는 느낌이 없는 최소의 선택이다.
실제로 선택이 하나 뿐일지라도 강제받는 느낌만 없으면 사람들은 다양한 선택보다 하나를 좋아한다.
사람들이 다양함을 원하는 것은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의 도피"일 뿐이다. 강제는 엄청난 고통을 주더라도 대안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강제를 싫어한다. 그러나 하나만을 강제 당했다고 꼭 반발하는 것은 아니다. 강제당했을 때 사람들은 "이는 강제가 아니라 나의
선택이었다"라는 식으로 생각을 한다. 자기 위안, 자기 변명으로 도피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형식만 갖춰준 독재가 꽤 통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심리에 있다. 독재는 생활의 수준이 견디기 힘들 정도에 갔을 때 무너지지, 강제라는 이유만으로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2002년을 기억해보자. 개혁 진영의 중요한 주장 중의 하나가 "이제는 보스의 시대는 가고 리더의 시대가 왔다"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짜 보스를 싫어할까? 아니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무능한 보스이다. IMF 사태를 부르는 무능한 보스에 사람들은 질려있었다.
이것이 보스 체제 자체에 대한 염증을 불렀고, 보스가 아닌 리더를 표방하는 노무현으로 인기가 모인 이유 중의 하나였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유능한 보스이다. 보스는 선택을 해 준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피곤한 '선택'이라는 짐을 떠맡아 주는 것이다. 대략 사람들이 좋아하는
순서는 유능한 보스 - 유능한 리더 - 무능한 리더 - 무능한 보스의 순서이다.
리더에게 인기가 모이는 경우는 무능한 보스가 개판을
친 직후의 상황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리더 체제가 자리를 잡으면 사회는 조금씩 보스 체제로 옮겨가게 된다. 이런 경향들이 누적되어 부시같은
망종 보스의 폐해가 나타나면 비로소 대중은 다시 리더 체제를 원하게 된다. 역사는 이렇게 반복된다. 유럽의 민주전통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히틀러이다. 유럽은 아직 히틀러의 망령에서 못 벗어났기에 조그만 강제에도 전 국민이 발끈하는 사회가 가능한 것이다.
이는 나이와도
관계가 있다. 젊은 사람들은 해 보고 싶은 것이 많고, 에너지가 넘친다. 당연히 보스보다는 리더를 좋아한다. 자신의 의견을 반영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달라진다. 골치 아픈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치명적인 것이 아니면 알아서 결정을 해 주는 것이 좋다. 보스의
우산 밑이 편한 것이다. 이런 심리는 슈워츠가 처음 주장한 것이 아니다. 사회심리학의 고전인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이후 꾸준히 다뤄졌던
주제이다.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 플라톤의 "국가론"에서부터 다뤄진 주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정도에서 중간 결론을 한 번
내려보자. 그렇다면 보스 체제가 옳은 것일까? 플라톤의 주장대로 철인왕 시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 사람에게 신분과 직업을
정해주는 것이 오히려 행복하게 살게 하는 길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왕도 정치의 타락한 형태인 참주 정치는 가장 불행한 정치 체제이다.
민주 정치의 타락한 형태인 중우 정치는 그래도 참주 정치보다는 견딜만하다. 참주 정치의 위험을 감수하며 왕도 정치를 시도하는 것은 모험주의다.
이상주의일 뿐이다. 문제는 어떻게 행복한 민주정치를 이루는가이다.
내가 생각하는 결론은 중용(中庸)이다. 선택의 기회는 그 자체로
혜택도 짐도 아니다. 능력보다 선택의 길이 좁으면 강제이며 불행이다. 이 상황에서는 선택은 혜택이다. 그러나 능력을 넘치는 기회는 짐이며 불행의
씨앗이다. 훌륭한 정치 지도자는 현재의 민도에 맞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사람이다. 불가피한 선택의 경우 이를 국민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 유능한 지도자이다. 전문적 판단이 필요한 일에 실제로 모든 국민을 직접 참여시키는 것은 유능한 지도자가 아니다. 이는
판단이라는 의무를 떠맡기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현재의 민도에 무조건 맞춘다는 것 역시 정답은 아니다. 그런
방법으로 정치지도자가 인기는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국가는 그 상황에서 머물게 된다. 현재의 국민들은 행복할지 몰라도 미래의 후손들은 아니다.
세상은 바뀌어 나가며 국가 간의 경쟁은 치열하다. 국가가 정체되면 결국은 생활의 질이 떨어지게 된다. 경쟁력은 다양성에서 나온다. 미래의 삶을
위하여 국가는 다양성을 보장하고 국민에게 다양성에 대한 훈련을 시켜야 한다. 검찰을 손에서 놓은 것은 성급했다고들 한다. 그런데 검찰을 그렇게
황야에 내 버려 두었더니 이제는 알아서 현대에 삼성에 칼을 댄다. 정부의 보호 우산에서 벗어난 기업들은 나라가 망하게 됐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런데도 장기간의 무역 흑자는 계속 되고 있다. 환율이 곤두박질을 치고 유가 뛰는 상황에서도 흑자는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어차피 논지를 뒤틀고 있으니 한 번 더 뒤틀어 보자. ( 잘 했다, 잘못했다로 딱딱 편가르기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매우 불친절한 글 쓰기 되겠다
) 그렇다면 노무현 정부의 자율성 강화 훈련은 잘 하는 걸까? 국민들의 오해를 무릅쓰고 밀어붙인 결과 이제 성과가 나오는 걸까? 어쨌든 국민들은
불행해졌다. 그것은 사실이다. '행복이다', '불행이다'라는 문제는 수치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의 문제도 아니다. 이는 전적으로 심리의
문제이다.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불행한 것이다. 살기 어려워졌다고 느낀다면 어려운 것이다. 실제적인 소득을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소득이 늘었어도 어려우면 어려운 것이다. 어려운 그 자체로 불행한 것이다.
기업들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머리가 복잡하고
불안하다. 그 만큼 어려워진 것이다. 불안정한 월 300만원의 소득보다는 안정된 월 200만원의 소득에서 사람은 더 행복하게 느낀다. 1년 총
소득을 따져보면 늘었을지라도 적자가 난 한, 두 달. 소득이 전혀 없었던 한, 두 달의 기억을 사람은 더 뼈저리게 느낀다. 더 가난해졌다고
느끼게 된다.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이 되어 수입도 줄고, 안정성도 줄었다면 이는 최악이다. 정규직 종업원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현재의 직업을
다시 고려해 보고 새로운 선택을 늘 찾아봐야 한다. 이는 바로 살기 어려워졌다는 느낌으로 다가오게 된다.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으면 람보와 같은
막강 군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군인은 실미도식 훈련을 원하지 않는다. 현재의 노무현식 자율성 강화 프로그램은 너무 강도가 세다.
그런 강도를 이길만한 사회적 완충 장치가 없기 때문에 더욱 힘들다.
지나친 선택의 기회는 문제는 일반 국민의 문제만이 아니다.
노무현 정권 형성기의 적극적인 지지자 집단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친 정부 게시판은 왜 썰렁해 졌을까? 노사모, 국민의 힘, 국참1219,
참정련 모두 활동 회원수가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적극 지지자들은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를 하고 당원 조직을 만들어냈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
영향력도 커지고 정치에 대한 이해도 많이 깊어졌다. 보람도 컸다. 정치에서 소외되었다는 느낌은 없어졌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주권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비용이 너무 컸다. 과정마다 골치 아픈 선택을 해야했고, 선택이 옳은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다.
그러한 심리적인
부담은 일상 생활을 흔들게 된다. 많은 적극 지지자들이 가정이 흔들리고, 직장이 흔들리는 경험을 해야했다. 노무현 정권이 지지자에게 요구하는
수준은 너무 셌다. 전업 정치로 나갈 생각이 아닌 사람이 부담하기에는 열린우리당 건설, 탄핵, 촛불 집회, 총선, 상향식 공천으로 이어지는 정치
일정이 주는 부담은 만만치 않았다. 지금 잠수중인 적극 지지자들은 과연 잠수 중인 것일까? 침몰의 위기와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파병
문제, 방폐장 문제 등은 너무 덩치가 컸다. 참여의 보람보다 선택의 괴로움 쪽이 더 크게 다가오는 문제들이었다. 많은 수의 지지자들이 적당히
둔감해지는 길을 택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 정권은 무능하지 않다. 무능한 정권이 6자 회담을 성공시켜 군사적 갈등을 줄일 수
없다. 환율 압력과 원자재 가격 상승 속에서 흑자를 낼 수도 없다. 무능한 정권은 교조적으로 간다. 정해진 원칙을 강조하고 밀어붙이는 것
이외에는 하지 못한다. 유능한 정권이어야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국민의 선택에 따라 수행할 수 있다. 다양한 선택을 제시한다는 것은 유능함의
증거이다. 그러나 국민의 눈에는 무능해 보인다. 무능하기에 정부가 정하고 밀어붙여야 되는 것을 국민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으로 보인다. 개인의
삶에 있어 끊임없이 선택하게 만드는 정부는 무능한 정부인 것이다.
글을 구상할 때는 강금실 서울 시장의 전략에 관한 문제를
짚어보려고 한 것이었다. 강금실 시장의 전략의 문제점 역시 노무현 정권이 인기가 없는 이유와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두가 너무 길어졌다. 이
정도에서 주제를 마무리하고 서울시장 전략의 문제는 강금실 캠프에서 스스로 고민하도록 넘기고자 한다. 나는 유능하기만 한 시장만이 아니라,
유능하며 동시에 유능해 보이는 시장을 원한다. "사실은 유능한 시장이야"라고 주위 사람을 설득하기에는 좀 지친 상태이기 때문이다. 결론을
내려보자.
반 박자를 앞서 나가면 대단한 골잡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한 박자를 앞서 나가면 오프사이드에 걸려 슛을 할 기회조차
잃게 된다. 자율성을 강화하려는 노무현식 정치는 옳다. 그러나 그 훈련 강도는 현재 국민들에게서 상당한 거부감을 주고 있다. 지나치게 박자가
빠르다. 정도가 적절한지 아닌지는 아직은 평가하기에는 이르다. 그 동안 쌓인 구태를 벗어나려면 한 번은 겪어야만 하는 고통이라는 주장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새롭게 도전하는 사람은 노무현을 벤치마킹해서는 안 된다. 노무현의 등장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이라는 무능한 보스에 대한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는 상황에서 이뤄졌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현 정부의 자율성의 강화를 무능함이라고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선거를 치러야 한다. 뭔가 똑 부러지는 느낌이 없이는 백전백패다. 이 부분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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