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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4. 13. 21:30정치

관찰, 기다림, 다름, 고통과 섬김, 용서

-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하면 분노의 노예가 되고 만다

관찰자왈

현안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 것이 다이나믹하고, 재미있기는 하지만 그 재미에 빠져들다 보니 현실적으로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기도 하더군요. 게다가 어느덧 전투를 즐기는 제 모습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놀라기도 했습니다. 조금 덜 열정적으로, 관찰자 본연의 자세로 한 발 떨어져 개인적이고 사소한 주제에 대해 끄적거려 볼랍니다, 편하게. 열린 회랑이니까.

1. 관찰

현안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내가 즐겨 쓰는 방법은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다. 비즈니스와 관계된 내용은 이미 결과를 드러내고 있는 꽤 많은 양의 수치들을 이리저리 나열하고, 조정해 가며 어설프나마 일정한 패턴을 찾아내어 나만의 예측모델을 만들어 본다. 그리고는 장, 단기로 시뮬레이션을 해 보며 그 모델의 완성도를 높여 간다. 마치 게임을 하는 것처럼 즐겁기도 하고, 종종 원하던 해결책을 찾아내기도 한다. 한편, 통상 며칠 정도 밤 세워가며 숫자만을 놓고 씨름하다 보면 저절로 집중력도 생기고, 뭔가가 정리되는 느낌이라 스트레스도 해소되는 부수적인 효과를 얻기도 한다.

특정한 역사현상에 대해 왜라는 의문을 한 후 그 의문을 해소해 가는 과정 역시 즐거운 작업이다. 또한, 갖가지 현상의 인과관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대체로 역사는 반복되므로 미리 예측가능한 현상들이 적지 않다. 따라서 반복되지 않는듯한 현재진행형 특이현상에 대해서만 특별한 관심을 갖고 깊게 관찰해 나가면 최소한 이해라는 측면에서 큰 어려움은 겪지 않게 된다.

지금의 국제정세가 100년 전 구한말시대와 너무나 유사하다는 점에 놀란다. 서구인의 식습관과, 후추라는 조미료, 제국주의의 기반을 다진 수많은 탐험가, 그리고 냉장고의 발명이 서로서로 긴밀한 연관관계에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나니 변화의 선봉에 선 특정품들의 공통점이 좀 더 쉽게 눈에 들어 오기도 한다. 정치에 관심이 많을 때에는 각국의 역사적인 정치형태를 살펴 공통점을 찾아본 후, 세계지도에다가 각 국가마다 왕정, 귀족정, 혹은 공화정이 더 낫겠다 싶은 표시를 나름대로 해보기도 했다.

관찰자에만 머무는 삶을 살아서도 안될 것이며, 내 스스로 매우 경계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세상은 세심한 관찰과 심사숙고보다는 단정과 주장, 모 아니면 도식의 성급한 결과내기가 유행인 듯 하다. 반골기질 탓인지 자꾸 세상과 거꾸로 가려는 관성이 강해져 관찰에만 집착하게 된다. 그저 언젠가 때가 오겠지 하고 기다릴 뿐이다. 내가 쓸모 있는 때를.

 

 

2. 기다림

한 때 무척 신부가 되고 싶었다. 이년 가량 마치 열병에 걸린 듯 꽤 심각했었다. 그러나 신부가 되기 위한 과정과 그 이후 신부로서의 삶이 외롭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해 보지 않았었고, 게다가 스스로 평가해 보건대 신심이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수도자로서의 뚜렷한 목표도 없었다. 그저 신이 하라시는 대로 하면 되니 크게 고민할 것도 없고, 존경과 떳떳함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액세서리 정도로 생각되었었다. 그야말로 무척이나 편안한 신부의 삶을 동경했던 것이다.

그런데 매우 고약한 신부를 경험하게 되었다. 막 사제서품을 받고 처음으로 사목에 나선 신부였는데 겸손한 구석을 찾아보기 어려웠고, 언행 또한 무척 가벼웠다. 부녀신자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가는 버스 안에서 흥을 낸답시고 하는 짓이 저속한 가사로 개사한 유행가 부르기였고, 골프를 몇 번 치더니 자신이 신부가 되지 않았다면 골프선수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이었다.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나와는 물론 다른 교우들 대부분과와도 갈등이 적지 않았고, 잠깐이었지만 신앙생활에 대한 회의가 생기기도 했다. 그와 크게 다투고 난 후에는 몇몇 교우들과 작당한 술자리에서 그 신부는 자격이 없으므로 옷을 벗겨야 한다는 말을 주고받기도 했었다. 큰일 날 소리였지만 소주 한 두 병 정도는 너끈히 해치울 수 있는 안주거리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뿔싸, 큰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 신부가 스스로 옷을 벗는 것이 아닌가? 내 말이 씨가 되어 그리 된 것이 아닌가 싶어 무척 두려웠다. 나뿐만 아니라 파계 운운했던 교우들 모두가 그런 눈치였다. 몇 달 간 잠을 잘 이루지 못할 정도로 후회막급이었다.

그가 옷을 벗은 이유에 대해 여러 뒷말이 무성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의 신심을 의심할만한 증거는 없었다. 그의 언동이 누군가에게 해를 입힌 증거도 없었다. 그는 단지 사람들과의 소통에 미숙했고, 한 인간으로서, 또는 한 신부로서 성숙해 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들은 우리들 기준의 신부 이미지를 미리 그려 놓고 거기에 그를 꿰맞추려 했다. 물론 그 기준에 미달되었기 때문에 해서는 안될 말까지 내뱉으며 그와의 갈등을 키웠었다. 신이 선택한 사람인데다 그 역시 과정이 필요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속적으로도 훌륭한 신부가 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못한 것이었다. 게다가 신부의 삶이라는 것이 범인들과는 매우 다른 삶임이 분명한데도……

 

 

3. 다름

미국에서 이년 동안 유학을 했다. 원래 공부에 뜻이 있었다기 보다는 세상구경도 하고, 미국이라는 나라의 원동력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인가를 이해하고 경험해 보는 것이 목표라면 목표였다. 누군가 팔자 좋은 유람이라고 비판한다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런데 나름대로 그 목표는 충격적이었던 첫 학기, 첫 강의실부터 시작하여 80% 정도는 달성했던 것 같다.

경제학 강의를 맡은 교수의 첫 일성이 Money in my pocket is the best(내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현금이 최고다)였다. 생전 처음 타 보는 비행기 타고 미국에 가서, 잘 들리지도 않는 영어 알아들으려고 무척 긴장하며 앉아 있던 첫 수업에서 들은 첫 마디였다. 희한하게도 또렷이 들리기까지 했다.

마치 판토마임을 하듯 호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더니 수표책과 크레딧카드들을 내버리는 시늉을 하고는 5불 남짓의 지폐와 동전 몇 개를 손에 쥐고 흔들며 하는 소리였다. 수표나 카드도 믿을 게 못되고, 당장 내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현금이 최고라는 말이었다.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놈들이 돈에 환장한 상놈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명색이 대학교수라는 자까지 이러리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첫 수업, 첫 마디로는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나중에야 그 교수가 그 이후 내가 접했던 수십 명의 교수들 중 가장 뛰어난 교수였다는 평가를 내리게 되었지만 아무튼 그 당시에는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30분 정도 지나 약간 정신을 차린 후에 더욱 기가 막힌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1 방향으로 2미터 정도 떨어진 자리에 앉은 두 남학생 녀석들의 행동거지가 보통 수상한 것이 아니었다. 맙소사, 거의 1분 간격으로 뽀뽀를 하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수업시간 내내 책상 아래로 서로 손을 잡고 있는 상태였다. 말로만 듣던 게이들이었다. 순간적으로 온 몸에 소름이 돋아 나오더니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의 한기를 주체하기 어려웠다. 어찌어찌 수업이 끝나고 나서 보니 얼굴은 화끈거리고, 심장은 쿵쾅거리고, 온몸은 식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 다음 수업은 어떻게 들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너무 피곤하여 손 하나 까딱하기 어려웠다. 첫 수업에 대한 긴장감에 충격까지 더해진 터라 그랬던 듯 싶다. 저녁밥도 거른 채 8부터 잠들었다가 다음 날 6시경에 잠이 깼다. 그리고는 당장 내 나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2년 동안 버틸 자신도 없었다. 아무리 딴 세상이라지만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에 분노를 넘어 미친 놈 마냥 헛웃음만 나왔다.

그러나 결국 그들과 최대한 먼 자리에 앉는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찾아냈고, 차차 그들의 여전한 행태도 그리 크게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다. 내 스스로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급기야는 기말교사 직전의 마지막 수업을 끝마친 후 그 게이녀석들을 중국식당에 초대, 같이 점심식사를 했다. 그 자리에서 그 동안의 내 태도에 대한 변명과 더불어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고,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내 시각에 대해서도 솔직히 털어 놓았다. 그런데 그 녀석들 역시 나에 대해 나와 비슷한 태도 변화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 아닌가? 자기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나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텐데 고맙게도 그들은 나를 적대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었다는 확인을 해주었다. 함께 꽤 유쾌한 점심식사를 즐겼고, 서로 마귀가 아니라는 것도 확인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게이들과 번갈아 가며 힘찬 포옹을 하고는 헤어졌다.

지금도 돈이 최고라는 생각이라든지 물론 약간 과장된 충격요법이었을 것이다 동성애에 대해 찬성하지는 않는다. 다만 아주 평범한 현상 한 가지를 확실하게 체험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가 동의하기 어려운 사고방식이나 행태일지라도 그것이 타인을 적극적으로 해치지 않는다면 그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느 정도 자연스러워졌다

공부는 간신히 턱걸이로 학위를 받는 수준 정도에 그쳤다. 틈나는 대로 미국 전역의 시골과 대도시를 번갈아 가며 돌아 다녔고, 세계 각국의 민속음식은 거의 다 맛본 듯 하다. 집에서 불고기, 잡채, 탕수육, 김치등과 맥주 몇 박스를 준비해 서너 번 파티를 열었더니 그 후 초대받은 파티가 20번이 넘었었다. 사실 내가 주관한 파티가 비교적 성대한 편이었다. 대체로 학생들의 파티라는 것이 마당 뒷 편에서 쏘세지나 햄버거 굽고, 맥주 마시며 수다 떠는 것이 전부였다. 나중에 사귀었던 학우들의 출신국가를 세어보았더니 총 28개국이었다. 귀국 전에는 배낭을 꾸려 3주 동안 유럽 15개국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거의 매주 새롭고, 다른 것을 경험한 셈이었다.

물론 재미있기만 했던 유학시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초창기에는 정신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웠다. 마지막 학기에는 천신만고 끝에 두 과목에서 기적의(?) A학점을 받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간신히 평균학점 3.0을 넘기고 학위를 받음으로써 망신은 면했지만 매우 불안감에 떨며 보냈던 마지막 학기였다.

 

 

4. 고통과 섬김

부부 사이가 원만치 못한 친구가 골방에 가족사진을 모셔놓고는 매일 108배 혹은 300배를 한다고 한다. 원만한 가정생활과 외아들의 행복을 간절히 기원하며 절을 하고 나면 온 몸과 바닥에 놓인 방석은 땀에 젖지만, 마음이 평안해지고, 머리 속은 맑아진다고 한다.

절을 하다 보면 육체적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기꺼이 그 고통을 부처님께 바치며 원하는 것을 기원하는 것이다. 한편, 나만 해도 왠만해서 누구에게 고개를 숙여본 적이 없다. 그 친구도 자존심이 무척 강한 친구다. 그런데 매일 아내와 자식, 자기 자신, 그리고 부처님께 108번 혹은 300번씩 온전히 온 몸으로 엎드린다.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며 누군가를 간절히 섬기는 절이 나는 참 좋다. 잘되는 것은 남이 도와줘서 그런 것이고, 천주님, 부처님, 알라님이 배려해 주신 것이다. 안 되는 것은 내가 잘못해서 그런 것이다. 세상이 공평하지 못함을 느껴 고통스러울 때마다 열심히 했는데도 안된 일보다는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잘된 일이 더 많았음을 깨닫게 된다. 알고 보면 남이 나를 괴롭힌 것보다는 나를 도운 것들이 더 많다. 남 탓해봐야 바뀌는 것은 없다. 기다려주든지, 나를 바꾸든지, 용서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5. 용서

그때그때 남을 용서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언제나, 온전히 남을 용서하는 것은 부모나 가능할까? 나 스스로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몇몇 사람들을 용서하고, 내 자신과 화해해야 잘 살 수 있을텐데 그게 쉽지 않다.

더 기막힌 것은 내 자신을 용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남을 용서하고, 화해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 용서가 안 되는 것이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할텐데 그러지 못한다.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하면 분노의 노예가 되고 만다. 화내고 분노하는 상태에서 행복해지기는 어렵다. 잘 살고 싶은 욕망도 있고, 그 방법도 어렴풋이 아는 듯 하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지를 못한다. 실천하지 못하면 다 허상이고, 허무 인 것을…… 언제쯤 관찰자 노릇에서 벗어나게 될지 내 스스로 궁금하기도 하다.

 

 

기회가 되면 다음에는 실천을 시작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풀어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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