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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3. 16. 08:41ㆍ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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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야트막한 산비탈 공원 아래 있는 2층 양옥이다. 이 집의 큰 어른은 올해로 100세가 되는 정양순 할머니. 18세 되던 해 인근 포두면 중촌에서 25살 낭군에게 시집와 첫 아이를 낳았다. 집안을 일으키겠다고 일본으로 건너간 남편은 13년만에 돌아왔고 정붙일 새도 없이 또 어디론가 떠났고, 그후 3년만에 돌아 왔다. 그러나 일제징용이 기다리고 있었고 다시 2년을 강제징집에 동원됐다. 남편이 천신만고 끝에 귀국한 시점에 여순사건(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가 제주도 출동 거부, 친일파 처단, 조국통일 등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일어났고, 군인신분이었던 남편은 여순사건 희생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 일은 당시 드문 일도 아니었으나 신혼의 달콤함은 너무나 짧았다. 좋았던 시절 청춘의 기억도 희미해져 버린 정할머니는 아직도 한 세기를 살아온 사람이라 보이지 않을 만큼 건강하다. 매일 오전 9시면 집을 나서 2km 떨어진 노인정과 집을 도보로 왕복한다. 노인정에선 맏언니로서 7~80대 아랫사람들(?)과 사는 얘기를 나누고, 노래와 화투놀이 구경에 시간을 보내다 4시쯤 집에 온다. 그 뒤엔 고손자의 재롱과 함께 세상을 관조하며 건강한 마음을 나눈다. 일평생 청상으로 한 많은 세월을 지탱해 왔지만 소식하며 절제하는 생활, 가족간 화목이 이어진 까닭인지 집안에는 온화한 기운이 가득 느껴진다.
“각자 제 위치에서 큰 욕심 없이 윗사람 존중하고 세상 이치대로 살면 되지 뭐.” 2대격인 장자 류중선(79)씨는 자연스럽게 결론부터 끄집어낸다. 류옹은 고흥 버들 류씨 5파 중 호산서파로 문중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유사(有司) 일을 6년째 보고 있는 류씨 종가의 어른. 5년 전엔 고흥유림들의 으뜸 자리인 당장 일을 2년간 맡아 보기도 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출간될 정도로 유교가 터부시되는 요즘, 유교를 큰 덕목으로 삼고 사는 류옹이지만 그는 신세대인 손자며느리의 애교 섞인 응석도 다정하게 받아 넘긴다. 일찍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인 김상엽(74)씨와의 사이에 7남매를 두고 산수(傘壽, 80세)의 세월을 맞고 있지만 지난 세월 돌이켜 보니 참 굴곡도 많았단다. 지금 사는 곳에 터를 잡기 14년 전까지,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던 두원면 관덕에서의 아픈 가족사는 그에게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이다. 슬하 일곱 자녀 중 가장 총명하여 대기업에 입사했던 22살 젊은 막내를 교통사고로 잃었고 장남이 대학교에 입학하던 날엔 집 축사에 화재가 났다. 그는 그 때의 충격으로 아내가 심한 고통을 겪고 신내림을 받은 일도 있었다며 정든 탯자리(태어난 곳)를 떠나오게 된 내력을 담담히 들려준다. 논 800평과 과수원 700여 평 그리고 집 주위 텃밭 200여 평이 가산의 전부지만 힘에 부치자 논은 이웃에게 임대해 주었다. 과수원과 작은 텃밭들은 노모와 류옹 부부의 소일거리가 돼주고 있고 류옹에게 지급되는 국가유공자 연금이 생활비의 숨통을 틔워주고 있다.
“마음과 몸이 괴로울 때 산에 오르면 다 해결돼요” 건축 일을 하는 3대 병석(46)씨는 낯선 방문객에 불편한 기색 없이 주변 일을 점검한다. 아내인 마정자(40)씨와 함께 실질적으로 살림을 떠받치는 집안의 대들보다. 여러 세대가 함께 사는 것에 대해 “특별히 가르쳐주지 않아도 사는 지혜를 생활 속에서 배우고 어려움이 닥쳤을 때 가장 큰 도움이 된다”며 불편함이 없음을 강조한다. 이른 나이에 손자를 봐 일찍 할아버지 소리를 듣게 되겠지만 어색한 것은 못 느낀다는 그는 대가족의 장점을 이야기했다. “3대 이상이 같이 사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해요. 식구들 간에 건강한 말과 행동, 생활문화가 없으면 한 지붕 아래 살기 힘들죠.”
떨어져 사는 노인들이 전화 너머로 들리는 손자, 손녀의 목소리만으로도 표정이 달라지고 행복감을 느끼는 원리 같은 것 아닐까? 대가족 제도의 가정에 장수노인이 많은 이유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가족 가정에 장수 노인이 많은 이유 군 입대를 앞두고 휴학 중인 4대 광영(22)씨는 정양순 할머니를 기준으로 하면 증손자. 대학생 신분이라 아직 결혼식을 안했지만 발랄한 새댁 김진영(22)씨와 다섯 명의 웃어른을 모시며 아버지 사업과 가사를 돕고 있다. 병석씨의 둘째아들 현조(17)씨는 완도 수산고 2학년에 다니는 체육(역도)특기생이다. 이미 중학교 때부터 전국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 현재 고등부 전남도 대표선수다. 올림픽 메달리스트 전병관과 닮은 체형의 그는 영광 재현을 꿈꾸며 일찍 부모 품을 떠나 훈련에 여념이 없다.
특히 외롭게 지내오신 정 할머니의 내리사랑은 각별하다. 100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고 손자와 며느리 4대가 만드는 정감어린 풍경은 집 앞 채마밭에서 또는 식사를 준비하면서,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가정행복의 첫째 조건이 구성원들의 건강한 생활임을 알 수 있듯이 모두가 건강한 기운으로 넘친다. 집 안쪽엔 군불 때는 황토방도 만들어져 있다. 천수(天壽)를 누리는 정 할머니는 노구에도 당신의 빨래를 손수 하시고 틈만 나면 호미 들고 주변 잡초를 뽑으러 다닌다. 가족들은 귀가 조금 어두울 뿐 앞으로 10년도 더 사실 것 같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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