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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2. 14. 17:06정치

스크린 쿼터보다 상상력을 허하라

- 개혁은 자발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노빠는 고달픈 길이다.

마레

1. 스크린 쿼터와 상상력
스크린 쿼터 축소를 두고 벌어진 하우미 간의 토론을 보면서, 새삼 “상상력”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싶었다. 우리는 무언가 불편하고 괴로운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살아온 것 아닌가. 역사란 그런 노력의 집적이요, 그러므로 모든 역사는 필연적으로 기존의 문법과 관행에 대한 투쟁사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 전제에 동의한다면 상상력이야 말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가장 기초적인 질료요, 전사들에게 지급되는 기본화기다.

자본이 힘이 센 것도 우리에게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은 아닐까? 하지만 자발적 상상력이 결여된 자본은 결국 몰락하게 되는 것 아닐까? 내가 아랍권의 오일달러경제를 그리 낙관하지 않는 이유도, 베드윈족에게 중요한 것은 사막이란 척박한 현실을 견디게 만드는 영원한 복락에 대한 확신이지, 그들 눈으로 보자면 허깨비 같을 현세의 빌딩이나 고속도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베드윈족이야말로 가장 비자본주의적 민족이다. 그러므로 아랍권 산유국들이 미래를 만든답시고 오일달러를 쏟아 붓는 모든 자본주의적 노력은 무위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

인심은 곳간에서 나지만, 상상력은 척박한 풍토에서 피어난다. 우리는 지금 한반도에 인간이 거주한 이래 가장 활발하게 무역국가로서 거듭나고 있다. 교역이란 본질적으로 노마드들의 것이다. 시장과 민주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들뢰즈에 따르면 노마드는 자기를 부정하고 새로운 자아를 형성하는 개념을 내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그 어떤 시대보다도 관행적 자아, 관습적 사고, 구시대적 권력에 대한 반항과 타파를 요구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시대인들 보다도 더욱 더 큰 상상력과 그 상상력을 현실화시키는 치밀함이 요구된다고 말할 수 있다.

스크린 쿼터가 왕의 남자를 만들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것은 아마도 필연을 빚어내는 수많은 우연들 중에 제법 덩치가 큰 우연이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왕의 남자도 상상력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상상력은 자고로 틀을 벗어나야만 가능하다. 척박한 현실이 상상력을 부른다는 역설은, 스크린 쿼터를 축소하느냐 마느냐, 영화가 쌀보다 중요하냐 아니냐는 차원의 논의를 넘어서 존재한다.

나는 매트릭스란 영화를 보면서 자기 세계를 저런 식으로 재해석해낼 수 있는 서양인들의 문화적 저력과 상상력에 전율했다. 이부 삼부로 가면서 박력이 떨어지긴 했지만, 매트릭스란 영화에서 구현되는 메시아 신앙과 아마겟돈 전쟁은 서구인들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이천년을 내려온 자기 정체성의 원형 중 하나가 아닌가. 그것을 스크린에 펼쳐 보이는 워쇼스키 형제의 문화적 감수성과 상상력은 그야말로 발군이었다.

자본이고 기술이고 스크린 쿼터고, 그 모든 논의를 하기 이전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자유로운 상상력이다. 그것을 허용하느냐 아니냐의 싸움에서 우리는 자꾸 미국의 문화제국주의가 만든 판옵티콘으로 기어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얻을 이익이 얼마고, 교역국가로서 세계 질서 재편에 홀로 뒤떨어질 수 없다는 정당성이 어떻고를 따지는 것 자체가 함정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생존방식은 우리가 만들어 간다란 자부심과 긍지가, 문화건 산업이건 사회 제 분야를 막론하고, 제1원칙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상상력은 본질적으로 여유의 반대편에서 만들어지지만,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여유다. 존재 이유로 기동하는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 우리 사회가 좀 더 느긋해지길 기대한다.

2. 민주주의와 지도자
권력이나 군중은 항상 양면성을 갖는다. 천만에 가까운 인파가 거리에 뛰쳐나와서 축구 응원을 해도 폭력사태가 빚어지지 않았던 것은 우리 사회의 성숙도와 집단성을 동시에 상징한다. 생명 복제 기술에서 우리가 선두를 달리고 있다는 전언과, 역사상 복제하고 싶은 인물 1위가 박정희라는 사실도 우리 사회의 성숙도와 전근대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비록 몸은 21세기에 살고 있고 근대국가를 극복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달콤한 속삭임이 제도 변화를 재촉하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전근대조차 극복하지 못했다. 문화적 사상적 사회적 지체현상으로 곳곳에서 삐걱대면서도 그래도 꿋꿋이 앞으로 나가는 대한민국호를 보고 있자면, 장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렴. 홍익인간의 나라, 배달의 민족 아니더냐.

오늘자 한겨레신문에서 노무현정부가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의제 설정에 있어서 대결모드를 고수하는 바람에 국가 권력의 정당성까지 의심받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지적이 있었다. 노빠로서 참 뼈아프다만, 동의한다. 사실 우리가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자면, 예견된 실패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대결 일변도로 살아왔던 자들이 갑자기 어떤 토론과 타협의 문화를 가꿀 수 있었겠는가.

민주주의는 뛰어난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는 말도 동의한다. 우리 대통령이 뛰어난 지도자란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신자유주의와 너무 쉽게 타협했고, 미래로 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거와의 결별을 끝내지 못했거나 힘에 부쳤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개혁세력의 한계가 이 정도인가 싶기도 하다.

며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 대전지역 시민운동가들과 오찬을 함께 하면서 참여정부에 대한 의견 청취를 하겠으니 오라는 초청을 받았다. 기꺼이 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 전날 서울에서 일이 있어 마지막 밤차를 타고 귀가했다. 일어나 보니 아뿔싸, 이미 모임 시간을 한참 넘겼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 나가질 않았다. 대통령이 만나자고 했다면 늦지 않았을 것이다. 청와대 수석비서관과 만나봐야 무엇이 변하겠느냐란 선입견이 내게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내가 개혁세력을 대표하는 걸로 착각해서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선 개혁세력의 한계다.

대통령은 국정을 운영하는 지도자이다. 시장은 시정 책임자이다.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국회의원을 만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들의 결정을 바꾸거나 추동할 힘은 사실 미미하다. 하지만 내가 나를 바꾸는 것은 누구의 조언을 듣지 않아도 가능하다. 개혁을 두고 나는 대통령이 하는 일로 미루진 않았는지, 오늘자 한겨레를 보면서 가책이 되었다.

민주주의는 좋은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개혁은 자발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노빠는 고달픈 길이다. 진작에 창빠나 그네빠 따위로 돌아서지 못한 게 무척 후회스럽다.

읽어주신 님들의 평안을 빈다.
마레 근서.


 

-노하우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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