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읽는 역사] 87년 6월 10일, 부산 충무동 시위 선봉에 선 민주투사 노무현의 ‘독재타도’ 함성

2012. 3. 9. 11:38사람 사는 세상

[사진으로 읽는 역사] 87년 6월 10일, 부산 충무동 시위 선봉에 선 민주투사 노무현의 ‘독재타도’ 함성
조회수 : 17 등록일 : 2012.03.09 09:38
사료편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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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편찬특별위원회에서는 수집한 사진 사료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이번에 제공되는 사진들은 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활동과 87년 부산 6월민주항쟁 관련 기록들입니다. 인권변호사이자 민주화운동가로 역사의 격랑을 맞았던 마흔 살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87년 6월 10일, 부산 충무동 시위 선봉에 선
민주투사 노무현의 ‘독재타도’ 함성



노무현재단 사료편찬위원회


1987년은, 이 땅의 민중들이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화’를 이룬 민중 승리의 위대한 역사를 쓴 해였다. 노무현 대통령도 87년을 부산의 민주화 투쟁 현장에서 보냈다.

81년 부산지역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 변론을 계기로 민권운동과 반독재운동에 나섰던 노무현 변호사는 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이하 부민협) 창립에 참여한다. 부민협 창립에는 송기인·손덕만 신부와 최성묵·박광선 목사 등 성직자들을 비롯해 문재인·김광일·이흥록 변호사, 소설가 김정한·윤정규, 시인 김희로 등 문인과 예술가 등 부산지역 민주인사들이 동참했다.

부산 민주화운동의 구심, 부산민주시민협의회

부민협은 창립 당시부터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의 감시와 탄압에 시달렸다. 창립총회가 있던 85년 5월 3일, 경찰은 대회장인 부산 YMCA에 난입해 행사를 막았고, 이에 항의하는 송기인 신부, 노무현 변호사, 고호석 부산인권선교협의회 간사, 최준영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부산지부 간사 등이 고관파출소로 강제 연행돼 구금되기도 했다.

또한, 창립 이후 경찰과 정보기관원들의 방해로 부민협 집회와 행사가 무산되거나, 관계자들이 연행 또는 감금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부민협은 서슬 퍼렇던 군사독재 정권의 폭압에도 불구하고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의 구심이 됐다. 시국 현안에 대한 성명 발표와 강연 등을 주도했고, 기관지 <민주시민>을 발간해 부산의 민주화 투쟁 소식을 전파해 나갔다.

노무현 변호사는 부민협 상임위원과 노동분과를 맡아 활동했다. 시국 및 노동사건 상담과 변론을 비롯해 토론회와 강연도 활발하게 펼쳤다. ‘학원안정법 반대 토론회’를 비롯해 85년 11월 25일 부산 YMCA 1층 강당에서 열린 ‘민주제 개헌을 향하여’ 강연회 연사로 참여한 바 있다. 당시 강연회 사진은 사료편찬위에 소장되어 있다



86년 들어 정국은 제1야당 신민당과 민주화추진협의회의 ‘직선제 개헌 서명운동’, 노동자 박영진과 서울대생 김세진·이재호 열사의 분신, 5·3인천항쟁, 부천서 성고문 등 시국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2·7 박종철 추도대회와 ‘인권변호사 노무현’의 구금

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진다.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연행되어 고문을 받아 숨진 박종철 사건에 대해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터무니없는 발표를 했다가 부검 담당의의 증언으로 거짓임이 드러난다. 전두환 정권은 사건 발생 닷새 만에 고문 사실을 시인했고, 해당 수사경관을 구속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다.

하지만, 고문 살해의 은폐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재야단체들과 신민당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가운데 2월 7일 전국 8개 도시에서는 ‘박종철 열사 범국민추도회’가 추진된다.

2·7 박종철 추도대회를 앞두고 지역마다 대회장은 원천 봉쇄됐다. 부산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박종철은 부산의 아들이었다. 추도회 당일, 대각사(부산 광복동 소재 사찰)는 사람의 출입과 차량 통행이 통제됐다. 7일 정오. 경찰의 검문검색과 경계를 뚫고 대각사에 들어가려다가 저지당한 대학생과 부산시민 수백 명은 ‘종철이를 살려내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를 벌였다.

오후 2시. 부민협 등 대회 주최 측은 다음 집결지인 남포동 부산극장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송기인 신부, 김기수 목사, 노무현·문재인·김광일 변호사 등과 부산 민가협 소속 구속자 가족, 대학생 등 3백여 명이 모였다. 김재규 부민협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추도회에서 <애국가>, <타는 목마름으로>가 선창됐고, 노무현 변호사 등이 연단에 올랐다.

연설 도중 뒤늦게 달려온 경찰들이 최루탄을 쏘자 대열은 흩어졌다. 분노한 시민들은 그대로 해산하지 않았다. 남포동 등 부산 중심가 일대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불어난 시위군중은 밤늦도록 충무로에서 시청으로 이어진 간선도로를 가득 메웠다. <부산민주운동사>(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1998년)에 기록된 당시 참가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날 추도대회에 참여한 사람은 2만여명이 넘어 1979년 부마 민주항쟁 이후 최대였다”고 한다.

노무현 변호사는 2·7추도대회 시위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다. 당일 대회장에서 연행되어 범일동 대공분실에 갇혔는데, 검찰은 김기수 목사, 노무현·문재인 변호사를 구속선상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중 노무현 변호사만은 반드시 구속시키려 했다.

검찰은 형사법상 ‘불구속 수사 원칙’을 어기고, 신병 처리 시한인 48시간을 넘기면서까지 현직 변호사인 노무현을 가둬두고 하룻밤 새 네 번이나 구속 영장을 신청하는 무리수를 감행했다.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노무현 변호사’를 구속시켜 부산 민주화 투쟁의 예봉을 꺾겠단 의도였다. 하지만, 법원에서 영장을 발부받지 못했던 검찰은 노무현 변호사를 구금 사흘만에야 풀어주었다(2·7추도대회 관련 부산에서 1백80명을 포함해 전국에서 7백98명이 연행되어 33명이 구속됐다).

‘검찰의 영장 발부 종용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전말은 이랬다. 9일 오후, 부산지검 공안부(주선회 부장검사)가 법원에 신청한 노무현 변호사의 구속 영장이 당직이었던 한기춘 판사에 의해 기각된다. 부산지법 한 판사는 노무현 변호사와 사법연수원 동기였다. 그러자 검찰은 윤우정 부장판사를 법원청사로 불러내 다시 영장 발부를 요청했다. 검찰이 재청구한 영장은 소명자료가 보완되지 않은 상태였고, 또 다시 기각됐다. 10일 새벽 2시30분경. 부산지검 특수부장과 차장검사가 조수봉 수석부장판사의 집까지 찾아갔으나 영장을 받지 못했고, 홍일표 부장판사에게 재요청했으나 끝내 거절당했다.

대한변협은 9일밤 인권위원장 유택형 변호사와 하경철 변호사를 급파해 해당 판사들을 면담하는 한편, 이 사건을 ‘사법권 침해’로 규정했다. 부산지방변호사회에서도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검찰의 인권 유린을 강력히 항의했다.

언론들은 사건을 자세히 전했다. <동아일보>는 ‘영장 발부를 종용하다니’ 사설(87년 2월 12일자)을 통해 “인권변호사에 대한 보복”, “법리와 상식 벗어난 검찰의 사법부 독립성 경시 작태” 등 표현을 써가며 검찰을 비판했다. 이 사건으로 ‘부산의 인권변호사 노무현’의 이름은 전국에 알려졌다.

4·13 호헌 선언과 직선제 개헌 투쟁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민중들의 분노는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 들끓었다. 그 와중에 전두환 정권은 국면 전환을 꾀하려고 개헌 논의 중단과 시위 엄단을 골자로 한 ‘4·13 호헌’을 선언한다. 그리고 관제언론을 동원해 ‘호헌 지지 유도’ 공작을 폈다. 신민당과 재야단체는 군사독재 정권의 정권 연장 기도에 반발했고, ‘호헌 철폐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한 민주화 투쟁은 더 거세게 전개됐다.

4·13 호헌 선언 2주일 뒤, 4월 27일 부민협은 제3차 총회를 열고 조직과 활동계획을 재정비했다. 그날 대연성당에서 열린 부민협 총회 후 기념 촬영한 사진이 있다.



87년 5월에 들어와 사제와 수녀들의 단식농성이 벌어졌, 목회자들은 ‘호헌 반대’ 기도회를 열었다. 변호사, 교수, 문인 등 각계 지식인들의 시국선언도 줄을 이었다. 그리고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미사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 조작됐고, 고문 가담 경관이 더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밝힌다.

이를 계기로 재야단체들은 ‘박종철 국민추도 준비위’를 ‘박종철 고문 살인 은폐 조작 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로 확대하고, 6·10 범국민대회를 추진한다. 그리고 6·10대회를 준비하면서 전국적인 조직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가 결성된다.

국본 결성 논의가 진행 중이던 때에 부산국본이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5월 20일 당감성당에서는 부산지역 재야단체와 종교계, 새로 창당한 통일민주당, 대학생, 노동자 등 1백명이 모여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 부산본부’(이하 부산국본)를 발족시킨다.



부산국본에는 부민협, 천주교정의구현 부산교구사제단, 경남목회자 정의평화실천협의회, 사회선교 부산지구협의회, 부산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부산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부산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 통일민주당 부산지역 지구당, 부산지역 총학생회협의회 등 단체들이 참가했다.

공동대표로는 최성묵(목사·부민협 회장), 박승원(신부·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광남(부산 민가협 회장), 권광식(부산 기독청년협의회장), 박찬종·서석재·김정수·문정수(통일민주당), 김상찬(민주헌정연구회 대표), 김종순(민주산악회 부산 대표) 씨가 참여했으며, 상임집행위원장 노무현, 상임집행위원으로 김기수, 김상찬, 김영수, 김용환, 김인호, 문재인, 배갑상, 소암 스님, 이광수, 이재만, 하일, 고호석, 김재구, 홍순오 씨, 사무국장 고호석, 사무차장 최병철 씨가 맡았다.

노무현 변호사는 부산국본 발족식에서 “사회단체와 정당, 학생, 노동자, 시민들이 폭력적인 호헌을 저지하고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범국민운동 대열에 나서자”고 호소하며, “군사독재정권의 무차별 탄압에 맞서 비타협적 투쟁으로 승리를 쟁취하자”고 촉구했다.

부산본부 결성 다음날인 21일엔 부산대에서 ‘범시민 시국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는 해고노동자, 철거민, 대학생 등 각계각층의 대표자들이 발언했는데, 노무현 변호사는 재야단체 대표로 참가했다.

지역마다 국본 조직들은 속속 결성되어 6·10대회를 준비했다.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 부산본부’도 조직의 통일성을 위해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로 개칭하고, 부산의 ‘6·10대회’를 준비한다.

뜨거웠던 6월 부산 거리의 민주항쟁 ‘야전사령관’

6·10 국민대회를 앞두고, 9일 각 대학들이 연 출정식에서 연세대생 이한열이 교문 앞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을 맞아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6·10대회를 기점으로 6월민주항쟁을 이어간 도화선이 됐다.

부산 ‘6·10대회’는 오후 6시 대각사 앞에서 예정되어 있었다. 경찰은 대회장 주변을 철통같이 에워쌌고, 광복동·남포동·충무동 등 시내 중심가를 통제했다. 집회가 원천 봉쇄되자 부산대 학생들은 부산의대병원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광복동 로얄호텔 앞에 모여 있던 대학생과 시민들이 자갈치시장 쪽으로 밀려나 대열을 이루었다. 경찰이 시위대에 최루탄을 난사하고 과잉 진압으로 부상자들이 속출했다.

그날, 부산국본 상임집행위원장 노무현 변호사는 충무동 로터리 시위대열 선두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 구호를 외쳤다. 시내 곳곳에서 동시 다발로 벌어진 시위는 자정을 넘겨서까지 계속됐고, 일부 대학생과 시민들은 박종철 열사 가족이 농성 중인 보수동 중부교회로 들어갔다.



시위는 다음날에도 계속됐다. 11일 부산지역 각 대학들이 ‘6·10 투쟁 보고대회’를 열고 거리로 진출했고, 12일에는 부산지역 총학생회 협의회 소속 대학생 1천5백여 명이 수산대에서 연합집회를 가졌다. 13일에는 전방입소 훈련을 마친 대학생 1천여 명이 부산역 광장에서 연좌농성을 벌였고, 그닐 저녁 부산대생 7천여 명은 교내 집회를 마치고 가두로 쏟아져 나왔다.

16일 시위는 더 격렬해졌다. 이날은 부산지역 9개 대학 1만여 명이 비상학생총회를 열고 가두에서 경찰과 투석전으로 맞서며 산발적인 시위를 이어갔다. 그중 학생과 시민 3백50여 명은 가톨릭센터에서 농성을 벌였다. 시위는 17일부터 가톨릭센터 농성 지지 투쟁을 중심으로 결집됐다.

18일. 이날은 국본이 ‘이한열 열사 죽음’에 항의해 정한 ‘최루탄 추방의 날’이었다. 전국에서 시위는 절정에 달했다. 부산에서는 노동자들이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대학생들과 성난 시민 30여만 명이 서면 로터리를 중심으로 대로를 가득 메웠다. 대열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노도와 같은 시위대는 부산역을 향해 행진했다. 남포동·국제시장·보수동 로터리에서도 수천 명씩 모여 시위를 벌였다. 서면 시위대는 범일 고가도로에서 경찰 저지선에 막혔다. 밤이 되자 시위대는 촛불을 들었고, 경찰 진압이 시작되면서 한 시민(이태춘, 27세, 태광고무 근무)이 고가도로 아래로 추락했다.

그날 밤 시위 현장에서는 전두환 정권이 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할 거란 소문도 돌았다. 그럼에도 시위군중은 해산하지 않았고, 자정을 넘겨 KBS로 몰려가 화염병을 던지기도 했다. 이 시위에서 또 한 시민(문철수, 33세)이 최루탄에 맞아 실명했다. 분노한 부산시민들의 시위는 밤새 계속됐고, 투쟁의 열기는 전국의 어느 도시보다 더 뜨거웠다.

22일. 가톨릭센터 농성자들은 경찰의 안전귀가 보장에 따라 자진 해산했다. 그런데, 해산 과정에서 경찰의 폭력 행사가 벌어졌다. 시위대에 대한 보복이었다. 23일 오후부터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신부들이 다시 가톨릭센터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25일 오후 8시에는 부산대병원에서 이태춘 열사의 부검이 있었다. 유족들과 함께 부산국본을 대표해 노무현 변호사와 천주교 부산교구 김두환 신부, 한미병원 강수만 박사가 참관했다.

26일에는 중앙성당에서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특별미사’가 열렸다. 그리고 대청동에서는 신부와 수녀들이 시민 1만 5천여 명과 함께 평화행진을 벌였다. 평화행진은 이날 저녁 퇴근길 시민들이 가세하면서 시위로 번졌고, 운수노동자들은 버스를 앞세우고 문현동 로터리까지 진출했다. 27일 오전 10시. 범일성당에서 이태춘 열사의 장례식이 있었다. 국민운동 본부장으로 거행된 장례식 후 시민들은 문현동 로터리까지 침묵시위를 벌였다.

28일 오후 3시. 중앙성당에서 열린 ‘폭력종식과 인권회복을 위한 특별미사’를 마친 신도와 시민, 학생 5천여 명이 가톨릭센터까지 행진했다. 가톨릭센터 앞에 모인 군중들은 연좌시위를 벌였고, 즉석에서 ‘시국토론회’가 열렸다. 노무현 변호사의 사회로 1시간30분 동안 진행된 시국토론회에는 노동자, 학생, 시민들이 나와 열변을 토해냈고, 열띤 박수가 쏟아졌다. 참석자들의 뜨거운 호응 속에 행사는 평화적으로 끝났다.



29일, 군사독재정권이 항복을 선언했다.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대통령직선제 개헌 수용과 양심수 석방을 골자로 한 ‘6·29 선언’을 발표했다. 노무현 변호사는 부산국본 관계자들과 함께 국본 전국 대표자회의 참석 차 서울행 기차 안에서 ‘6·29 선언’ 발표를 들었다. 서울 회의에서는 6·29 선언 수용 여부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하지만, 야당이 6·29 선언을 받아들여 장외투쟁을 중단하자 시위 열기는 식어갔다.

사람들은 87년 6월을 부산의 거리에서 보냈던 노무현 변호사에게 ‘부산 6월민주항쟁의 야전사령관’이란 별칭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투쟁의 현장에서 대학생, 시민들과 어깨 걸고 불렀던 민중가요 <어머니>는 노무현의 가슴을 진한 감동으로 울렸고, 노랫말의 한 구절인 ‘사람 사는 세상’은 그의 평생 꿈이 되었다.

6·29 선언 후 각계각층에서는 민주화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7월부터 전국의 노동현장에서 노조 설립과 민권 투쟁이 일어났다. 이른바 7~9월 노동자 대투쟁이다. 부산국본은 6월항쟁 후에도 ‘노동자 투쟁'을 지원했다. 노무현 변호사는 노사 분규 현장을 뛰어다니며 상담과 지원 활동에 나섰다. 9월엔 대우조선 노사분규 도중 최루탄을 맞고 숨진 이석규 열사 사건의 진상조사에 나섰다가 ‘3자개입’ 및 ‘장례방해’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사료이야기 ‘87년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사건과 변호사 노무현의 구속’ 참조).

6월민주항쟁에서 보여준 민중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그해 연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야당 지도자 및 민주세력의 분열로 결실을 맺지 못한 채 군사정권의 재집권이란 결과를 맞았다. 사람들은 절망했다. 노무현 변호사도 그 절망을 안고 제도정치권에 뛰어들었다.

세월이 흘러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6·10민주항쟁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87년 6·10항쟁은 국민이 승리한 역사입니다. 그러나 분열과 기회주의가 6월항쟁의 승리를 절반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국민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이 잘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머지 절반의 승리를 완수해야 할 역사의 부채를 아직 벗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자명합니다. 나머지 절반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