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과 한 개인 ‘나’의 책임은 서로 어떻게 분배해야 할까?

2010. 9. 26. 14:34정치

집단과 한 개인 ‘나’의 책임은 서로 어떻게 분배해야 할까?
유시민 전 장관이 언급한 ‘골드하겐 테제’

(서프라이즈 / 솔트 / 2010-09-25)


광의의 의미에서 집단은 민족, 국가, 체제 등으로부터 회사, 법인, 커뮤너티까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개인은 한 개인 ‘나’일 뿐이다. 집단과 개인의 모호한 책임 관계는 이러한 지점에서 시작된다. 집단이 해체될 만한 매우 심각한 문제나 사고가 발생 시 개인은 집단에 귀책사유가 있다고 주장하고 집단은 대개 이를 격하게 부인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집단은 소멸하면 그만이니깐. 때문에 한 개인은 집단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다.

 

재작년 겨울 유시민 장관은 경기도 시흥의 한 강연에서 한 개인의 책임(?) 문제를 화두로 꺼냈다. 족박이의 승리로 끝난 대선 직후 많은 분들이 비슷한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세계 최고의 학력 수준과 다이나믹하게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그 성과를 누린 나라에서 어떻게 전과 14범의 도둑놈, 사기꾼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그것도 직접 선거로…. 이 명백한 도덕적 패배 앞에 한 개인 ‘나’들은 망연자실했다. 이 강연에서 유 장관은 “한 개인이 책임을 방기하면 (민중의 선택) 선거로도 히틀러 같은 끔찍한 권력이 충분히 탄생할 수 있다”며 이어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 ‘골드하겐 테제’에 대해 언급했다.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에 언제 간 써야지 하다 귀차니즘에 밀려 이제서야 다룬다.

 

90년대 중반 하버드 대학 역사학과 골드하겐 교수는 ‘히틀러의 자발적인 사형집행인들’을 출간한다. 앞서 출간된 브라우닝 교수의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동조와 함께 반론적 성격을 지닌 이 책은 출간되자 곧 독일 사회에 큰 반향을 불렀다. 이 테제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과 독일사에 대해 간략한 언급이 필요하다.

 

전쟁 종결 후 루스벨트는 연합국이 물리적 승리뿐만 아니라 도덕성도 우위에 있었다는 것을 만방에 선전하고 싶어했다. (사실 루스벨트도 전쟁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주변 동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상 최초로 전범 재판을 열기를 원했다. 결국 그 장소로 나치의 성도(聖都) 뉘른베르크를 택했다. 폐허가 된 이곳을 택한 것은 히틀러가 33년도에 25만 명의 당원을 운집시킨 가운데 반인종법을 천명했던 것을 상기시키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 재판을 통해 나치의 인종 학살의 만행이 세상에 알려지자 전범들도 크게 당황했다.

 

 

괴링 등 핵심 요직에 있었던 전범들은 교수대에 오르기 직전 최후 변론에서 “이 재판은 거짓이다. 난 집단학살은 결코 몰랐다. 군인으로서 충성을 다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히틀러 치하 노동부 장관 스피어는 최후 변론에서 일련의 명징한 언어를 통해 독일인으로서 부끄러운 감정을 씻고자 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스피어의 변론을 끝으로 종결되었다. 독일은 전범 재판이란 외부의 힘을 빌려 인도적 범죄에 대한 무거운 짐을 겨우 내려놓는 듯 보였다.)

 

당시 독일의 권력은 ‘우파’ 기독민주당 아데나워가 장악했다. 그는 이승만처럼 전면적이고 탐욕스럽지 않았지만 전쟁에 직접 책임이 있는 기득권·전범들과 손잡았다. 곧 그들을 복권시켰고 사회 요직에 기용했다. 독일은 분단에 대한 보상인 마샬 플랜으로 막대한 지원금을 받았고 빠른 속도로 복구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순풍을 단 듯 나아가 ‘라인강의 기적’을 앞둔 독일에 큰 정치적 격변이 불어 닥쳤다.

 

그 시작은 프랑스로부터 시작된 68 학생운동이었다. 과거사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던 기성세대에 불신감을 가진 독일의 학생 사회는 크게 동요했고 곧 프랑스보다 더 거세게 저항했다. 젊은이들은 지하철에서 (우리로 치자면 조선일보와 비슷한) 주류 신문을 읽는 노인을 폭행하고 그 신문사도 공격했다. 이즈음 저명한 여성 언론인 마인호프도 펜을 놓고 총을 들었다. 전에 없던 개혁의 열망은 이듬해 선거에서 ‘좌파’ 사회민주당과 빌리 브란트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다.

 

반나치 운동을 벌여 망명까지 했던 전력을 지닌 빌리 브란트는 1970년, 독일 총리로는 최초로 폴란드를 방문했다. (양국 관계 정상화를 위한) 바르샤바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폴란드를 방문했지만 시선은 싸늘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그는 예정에도 없이 바르샤바의 한 유대인 추모비를 방문했다. 추모비 앞에 선 그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 당시 TV 생중계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전 세계가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무릎을 꿇은 건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는 평을 받았다.

 

빌리 브란트는 무릎만 꿇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 돈으로 치면 360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재정을 유대인과 희생자에 대한 배상금으로 지급하는 정책을 수립했다. 보수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 때부터 독일이 저지른 범죄를 교육하는 정책도 단행한다. 빌리 브란트는 동·서 화합의 상징이자 이후 독일 통일의 기틀이 된 동방 정책을 밀고 나갔다. 그는 이러한 업적으로 노벨평화상도 수상했다. 그의 과거사를 참회하는 일련의 정책들로 인해 세계는 독일에 대해 재평가했다.

 

이때서야 독일인들은 전범 재판과 같이 외부의 힘이 아닌 자신들의 힘으로 과거의 어두운 기억을 완전히 벗어나는 듯 보였다. 그리고 평범한 독일인들은 흔히 이렇게 말했다. “학살요? 저는 몰랐어요” “그것은 결코 제 책임이 아닙니다” “나치의 잘못입니다” “그것은 히틀러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참 익숙한 레테르(수사) 아닌가. “친일파가 뭘 잘못했나요. 그들은 웃대가리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광주 학살의 책임은 전두환입니다. 우린 그저 명령에 복종했을 뿐입니다” “전 그때 아무것도 몰랐어요” “우리 같은 서민들이 뭘 알겠어요. 경제 살린다고 하기에….” 그 정점에 “노무현 덕분에 이명박이 대통령 먹었다”가 있다.)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하버드 대학의 저명한 젊은 교수인 골드하겐은 의문을 가진다. “정말 나치와 히틀러만의 책임일까” “평범한 독일 시민은 과연 책임이 없는 걸까?” 의문 끝에 그는 이 문제에 대해 파고들었다. 즉시 독일로 날아가 만행에 참여한 평범한 병사와 시민들에 대한 자료를 모은다. 작전 계획, 작전 평가, 수행 기록, 병사들이 가족들에게 학살 과정을 자랑스럽게 기술한 편지, 가족들이 다시 즐거워하며 보낸 답장들, 등등 방대한 자료를 수집한 끝에 골드하겐은 ‘그들은 평범한 독일인이자 자발적인 집행자들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여 책 제목은 ‘히틀러의 자발적인 사형집행인들’이다. 그는 학살에 평범한 독일인들도 가담하였다는 사실을 학문적으로 입증했다.

 

독일 사회는 골드하겐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이제 암울함을 벗고 정상화를 희망하는 독일인들을 또다시 좌절하게 하는 것이었다. 언론은 우파, 좌파를 막론하고 골드하겐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슈피겔’ 지는 “골드하겐이 독일인들의 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제2차 전범재판을 개최하러 과거로부터 온 보복자, 검사 노릇을 한다”며 그를 “독일인의 사형집행자”로 묘사했다. 우파계열의 ‘융에’ 지는 “독일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과거의 죄를 기억시키려는 정기적인 시도의 하나”라고 분개했다. 역시 보수계열인 ‘디 벨트’는 “골드하겐 같은 팸플릿 저자 따위에 의해 반복해서 지옥으로 떠밀려지는 불행한 독일인에 대해 비통하다”며 “골드하겐이 말하는 독일인 전체의 ‘유죄’를 주장하는 테제 역시 ‘인종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독일이 우리와 비견해 분명히 훌륭한 점이 있다. 논란의 중심인 골드하겐을 초청해 공개 심포지엄을 벌인 것이다. 우리로 치자면 백분토론, 그것도 황금 시간대에 골드하겐과 그의 논리에 반대하는 학자들의 심포지엄을 전국에 생중계 방송한다. 이 자리에서 권위 있는 역사가 크비트, 브라우닝 등은 하겐의 절제 없는 일반화와 반유태주의의 역사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조목 조목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역사가들의 학문적인 비판에 대해서 일반 청중들은 차가운 침묵으로 일관했던 반면 자신의 취약한 테제를 방어하려고 애쓰는 골드하겐에게는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는 사실이다. 이때 하겐의 일관된 방어 논지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한 시민이 자신에게 귀속된 책임을 권력에 떠넘길 때 현재와 같이 항상 맞물려 있고, 또 마땅히 맞물려 있어야 할 역사란 테제는 그저 과거로 화석화되어 과오는 완벽히 소멸된다. 이런 역사적 소멸이란 아예 그 사건과 그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600여만 명이 넘는 희생자도 없고 가해자도 없다. 그렇다면 애초 우리한테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인가?” 독일 청중들은 그의 반론에 열렬한 박수로 화답했다.

 


※ 뉘른베르크 재판, 스피어의 최후 변론

 

“독일과 같이 진보되고 문명화된 국가에서 히틀러의 악마적 통치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답은 현대 기술에 있다. 라디오와 같은 기술 발전과 보급으로 더 이상 멀리 지방관을 파견할 필요 없다. 그런 기술을 장악한 히틀러는 직접적, 개별적 통치를 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개인의 자유가 근본이 된다. 과연 앞으로도 그럴 것인가?

이 전쟁은 원격조정 로켓이 나오면서 끝났다. 10년 후면 대륙 간을 날 수 있는 로켓이 개발될 것이다. 무서울 정도로 정확히 발달하고 있다. 원자탄도 개발되었다. 뉴욕의 백만 명을 몇 초 만에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대규모 전쟁이 인간 문화와 문명을 파괴할 것이다. 그래서 이 재판이 그런 재앙을 막아야 한다. 신이여 우리 독일과 인간 문화를 보존하소서”

 

(스피어는 전쟁 중에 이미 나치즘과 히틀러를 부인했다. 히틀러 제거 음모에도 가담한 바 있다. 그러나 재판 중 그는 다른 전범들과 달리 자신의 죄를 부인하지 않고 처벌을 원했다.)


사족 : 쓰고 보니 이 글을 왜 쓰고자 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족박이 개새끼’ 한마디 하면 될 걸 왜 이렇게 어려운가. 그러나 한 집단이 엄청난 문제에 직면했을 때 한 개인 ‘나’와 집단의 책임은 결코 나누어지거나 그 책임 전부를 ‘집단’으로 떠넘길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단죄도 반성도 책임감 있는 자들이 하는 것이다. 스피어처럼, 하겐에게 박수를 보낸 시민들처럼…

 

솔트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202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