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 28. 12:05ㆍ정치
노무현 대통령님, 추석 잘 쇠셨습니까
(블로그 ‘진실의 힘’ / 김창호 / 2010-09-27)
대통령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올여름은 유난히 무덥고 비가 많았습니다. 태풍도 몰아쳐 많은 피해가 있었습니다. 추석 직전에는 서울에 103년 만의 폭우가 쏟아져 가난한 사람들이 서러운 추석을 보냈습니다.
아직 햇볕이 따갑습니다만 아침, 저녁으로 제법 서늘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추석은 잘 쇠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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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막바지에 대통령과 여러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홍보처장으로서 대통령님과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특히 2007년 마지막 해, 대통령과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주로 시대정신에 대해 논의했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빈틈없는 정부 운영을 해야 한다며 여러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셨습니다.
“총대 매개해 미안하네”
퇴임 하루 전날이던가요. 대통령님께서 커피 한잔하러 올라오라 했습니다. 대통령께서 그때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김 처장, 총대 메게 해서 미안해. 대학 복직도 못 하고… 개인적으로 너무 많은 희생을 한 것 같아 정말 미안하네”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대통령님께 오히려 감사드립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앞에서 일 시켜놓고 한 번도 뒷거래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끝까지 원칙과 약속을 지켜주셔서 오히려 저희가 일하기 매우 편했습니다. 저희들의 고통이 대통령님만 하겠습니까.”
대학복직이 무산되고 주변 권유로 캐나다 UBC에 교환교수로 나갈 때, 출국 직전 대통령님을 찾아 뵜습니다. 지금도 핸드폰에 그때 부엉이바위 위에서 대통령님과 함께 찍은 사진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2008년 10월쯤 캐나다에서 돌아왔을 때, 대통령께서는 저를 반겨주셨습니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미래에 대해 함께 공부하자고 하셨습니다. 저는 해직된 홍보처 직원과 연구자들로 지원팀을 꾸렸고, 서초동에 사무실을 마련했습니다.
저희는 대통령께서 읽을 책과 자료를 준비했습니다. 거의 매주 1박2일 봉하에 내려가 함께 토론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그 1박2일 토론회를 손꼽아 기다리며 밤새 컴퓨터 앞에서 준비작업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나중에야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업을 확대하기 위해 2009년 초 전직 장관출신 교수들도 합류했습니다. 대통령께서 직접 고안한 인터넷 토론방(CUG)도 마련됐습니다. 대통령께서 수많은 질문을 던졌고, 저희는 그 질문에 대한 답변자료를 만들곤 했습니다.
“‘진보의 미래’로 가자!”
토론을 할 때마다 대통령께서는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치 학구열에 불타는 젊은 학생 같았습니다. 그때 하신 말씀이 『진보의 미래』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많은 분량의 문건을 직접 작성한 뒤 직접 발제도 하셨지요.
당시 대통령님의 문제의식은 ‘국가의 역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정치적 민주주의는 물론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위해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셨지요. 참여정부 기간 세계화로 인한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사회복지를 충분히 확충하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토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진보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라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국가의 역할을 강조할 경우 자칫 진보가 국가주의와 동일시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국가의 역할이 강조되면 자칫 민주화에 따른 시민의 자유가 후퇴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신 거죠. 우리의 역사적 경험에서도 국가가 경우에 따라 권위주의적 통치수단이 되어 개인의 자유를 폭력적으로 제약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국가이론과 실제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특히 국가를 협치(거버넌스)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성에 대해서도 논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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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역할을 강조할 경우 야기될 수 있는 이런 문제들 때문에 주제를 전환할 필요성이 제기됐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역할’이 아니라 ‘진보의 미래’에 대해 논의하자, 즉 국가가 아니라 진보를 주제화하자는 논의가 시작됐습니다.
반론도 있었습니다. 아직 진보를 주제화하기에는 사회적, 이념적 여건이 매우 어렵고, 모험적이라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여전히 ‘진보=좌빨’이라는 이념적 프레임이 강고한 현실을 고려하면 이런 우려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진보의 미래’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대통령께서 현실정치인이 아닌 이상 우리 사회의 본질적 의제를 생산할 필요가 있고, 향후 20년간 몰입하셔야 할 의제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결국 대통령께서는 “진보의 미래로 가자!”라고 결정하셨습니다.
“진보가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 대통령께선 훌쩍 이 세상을 뜨셨습니다. 죽음을 선택하던 마지막 순간에도 그 고통 때문에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라고 쓰셨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대통령께서 『진보의 미래』를 위해 글을 읽고, 쓰는 일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셨는지 가슴 미어지게 깨달았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아무도 원망하지 마라’라고 하셨지만, 저희는 검찰조사를 핑계로 1박2일 토론을 게을리했던 자책과 자괴감을 지울 수 없습니다.
지난해 말, 저희는 대통령께서 남기신 말씀을 『진보의 미래』라는 책으로 정리했습니다. 대통령께서 그토록 쓰고 싶어하셨던 책입니다. 저도 대통령님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정리한 여러 문제의식들을 『다시 진보를 생각한다』로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말, 권양숙 여사님을 모시고 망년회 겸 『진보의 미래』 출판기념회를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권 여사님은 “아직도 당시 토론에서 나누었던 수많은 말들이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진보는 대통령의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것이 되었습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소리없이 흐느꼈습니다.
『진보의 미래』에 대해 일부 ‘원리주의적 진보주의자’(대통령께서 ‘낡은 진보’를 이렇게 개념화하셨지요)들은 진보가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전유물이 돼버리는 바람에 진보가 신자유주의에 의해 훼손됐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진보담론은 우리 정치에서 빠르게 퍼져 나갔습니다. 대통령님과 저희의 예견을 훌쩍 뛰어넘는 속도로 말입니다.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진보교육감 후보로 분류한 분들이 대거 당선됐습니다. 또 자칭 대선급(?) 정치인들이 너도나도 진보를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어느 정치인은 기사에서 ‘중도’로 표현된 것에 대해 참모들에게 노발대발했다고 합니다. 또 어느 정치인은 민노당의 정책을 자신의 주요 정책으로 차용하기도 했습니다. 과거 운동권 출신의 젊은 정치인은 ‘탈(脫)자본주의’를 주장합니다. 어느 정당은 ‘진보자유주의’를 공식이념으로 채택했습니다. 정말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돼버린 느낌입니다.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말했습니다. “공산주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고. 마찬가지로 지금 한국에는 진보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습니다. 이제 진보의 플래카드를 내걸지 않으면, 정치한다는 말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 됐습니다.
“본질적으로 사고하고 근본적으로 행동하라”
이러한 현상은 꼭 바람직하지만은 않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우선 이들은 진정성을 의심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전혀 진보를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마치 진보가 자신의 ‘오랜 신념’인 것처럼 떠벌립니다.
이들은 공부에도 소홀합니다. 치열한 고민과 공부로 정치적 의제를 만들고, 이를 통해 대중을 결집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합니다. 언젠가 대통령께서는 “정치는 담론(의제)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 대중을 세력으로 결집하고 주류를 교체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의제와 담론이 없는 정치는 뒷골목 양아치 정치에 불과합니다. 시대정신과 의제를 설정하고, 현실의 벽을 넘는 대안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정치는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유흥가 조직폭력배의 세력 다툼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야권의 지도자들에게도 이러한 의제(담론)가 없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MB에게 얼토당토않은 ‘공정사회’라는 의제를 빼앗기고 허둥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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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제와 고민이 없는 정치는 양아치 정치이며, 조폭들의 세력 다툼과 다를 바가 없다. |
다시 말해 요즘 진보담론이 유행한다면, 그것은 고민과 공부의 결과가 아니라, 그저 유행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진보진영은 진보의 구체적 각론, 예컨대 공정, 정의, 균형발전 등의 세부의제를 개발하지 못한 채 그 주도권을 MB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MB 정권이 다양한 세부의제를 발 빠르게 내놓는 것이 정권 재창출 프로그램에 따른 것이라는 생각합니다.
현재 야권 정치인들이 얘기하는 진보는 고민 없는 진보담론에 머물러 있습니다. 대통령님과 저희들은 진보가 우리 시대의 중요한 가치이지만, 과거의 낡은 진보로는 더 이상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이를 새롭게 재구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었습니다. 과거에는 계급투쟁이나 남북관계를 중심에 놓고 진보-보수를 생각했다면, 오늘날 진보-보수를 가르는 의제는 매우 다양해졌습니다. 낙태, 사형, 사이버상의 자유 등 매우 다양한 의제가 등장했고, 이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진보담론의 유행을 쫓는 일부 야당 정치인들은 기존의 낡은 프레임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대통령께서는 아마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사고하고 근본적으로 행동하라!”
진보는 대통령께서 저희에게 유업으로 남긴 과제입니다. 이제 진보는 대통령님의 말씀이 아니라 저희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이제 저희도 이 의제를 피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통령께서도 지켜봐 주십시오.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예전에 저와 봉화산을 오를 때처럼 꼭 두꺼운 옷을 챙겨 입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편지 드릴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김창호 / 전 국정홍보처장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202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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