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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6. 21. 09:34정치

[마레의 횡설수설10] 보라, 승리를 확인하러 우리가 왔다

-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정당성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존재다

마레

보라, 승리를 확인하러 우리가 왔다

온통 축구이야기 뿐이다. 스위스 전을 남겨두고 있지만 벌써 16강에 올라간 듯하다. 퇴근 후에 빨간 옷을 입지 않으면 괜히 비애국인처럼 느껴지고, 북한이 미사일을 쏘네 마네 해도 별로 겁이 안 난다. 경우의 수를 따지는 사람들, 일본과 중국의 평을 즐기는 사람들로 한반도의 남녘은 시방 축제중이다.

하긴 우리는 세계 최초로 700만 명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도 별일이 안 생기는 나라 아닌가. 미국에선 겨우 몇 시간 정전으로 아비규환이었다는데, 우리는 무려 700만 명이 길거리를 장악했지만 불상사가 없었다. 당시 나는 그런 사실이 매우 기쁘고 즐거웠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 나는 다시 불타오른 축구 열기 속에서 지난 4년을 생각해 본다.

월드컵 4년 동안 있었던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이다. 당선 이후로 탄핵과 두 번의 재신임(총선과 지방선거)이 있었다. 단순하게 말하면 대통령 당선->탄핵->재신임->재탄핵이 거듭됐다. 거리응원은 여전한데 의원내각제도 아니건만 4년 사이에 이런 격랑이 몰아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일을 예사로 받아들이는 우리들은 대체 어떤 정치적 지평과 지향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은 극적이었다. 그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당선됐고, 그래서 적대적인 정치세력은 그를 탄핵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탄핵 이후에 치러진 총선이 어떠했던가. 우리나라 정치사상 최초로 여당(직전까지 만년 야당이었던) 단독과반수란 상황을 만들어주지 않았던가. 이것은 실로 대단한 정치적 승리다.

현대정치사를 보면 우리나라 야당은 실로 사느냐 죽느냐를 걸고 정치를 해왔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지나 전두환에 이르기까지, 그 이후로 노태우나 김영삼 정권까지 정권을 잡은 자들이 정치적 반대자를 어떻게 대접했는지를 상기해 보라. 정치적으로 야당이었던 자들의 삶의 현장은 엄혹하고 힘겨웠다. 저들은 늘 생존을 위협받으며 살아야 했다. 실제적인 의미로 생존을 걱정해야 했다. 지금 모모 공단의 감사로 이사로 들어간 사람들 중 여럿은 현 정권 이전에는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 사실을 우리가 애써 잊으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우리는 소수였고 약자였다. 우리의 실체는 기득권 세력의 총공세 앞에서 맨몸뚱이 하나로 싸워왔던 사람들이다. 우리를 붙잡아준 근거는 우리의 도덕적 정치적 존渶隙?정당성뿐이었다. 우리는 우리들의 정치적 올바름을 우리 존재 자체로 증명했던 사람들이다. 적어도 우리가 야당이었고 우리가 저들을 적이라고 불렀을 때는.

나는 우리의 패배가 단지 좌파신자유주의란 말로 대표되는 대통령의 갈지자 행보 때문 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노대통령은 다른 전임 대통령들처럼 장점과 단점을 갖고 있다. 정점으로 단점을 덮으려는 시도도 우스꽝스럽고, 단점을 들어 존재 자체를 비아냥거리는 것도 소인배 짓거리다. 패배는 우리들의 거대한 한계 때문이었다.

그것은 과거 우리의 정당성이 우리들의 존재 자체로 증명됐던 시절에서 우리들의 꿈과 희망이 진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진 한계다. 우리가 희구했던 희망과 꿈은 사실 우리가 나이 들고 우리의 욕망이 다변화되면서 희석되었고 변화되었으며 충족되었다.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에 당선시켰다는 사실이 어쩌면 우리 희망의 일단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쉽게 넘겨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승리에 도취해서 우리의 희망을 연장했고 확대했다. 그 희망을 달성할 수 있는가를 따져보지도 않고, 우리들의 능력에 대한 면밀한 점검도 없이, 일말의 회의 없이 우리들의 희망을 확대했다. 기실 우리들의 희망 자체가 빛바래고 아스라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정권 시절 우리들의 희망은 적을 무찌르는 것이었다. 적을 무찌르기만 하면 민주와 자주와 평등과 같은 가치들은 우리에게 저절로 주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군사정권도 아니고 민주정권도 아닌 어중간한 시절 동안 우리의 희망은 희석되었다. 절차적 민주주의나 국익을 생각하는 자주처럼 우리들의 가치는 어떤 수식어를 동반했다. 그것은 우리가 현실을 수용해야만 한다는 의미였다.

현실이 이상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상만을 강조할 때 현실이 우리를 비웃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가졌던 희망과 이상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했고, 우리들의 패러다임이 80년대에 갇혀서 피아공방만을 염두에 뒀기에 우리는 자체모순과 한계에 빠졌던 것이 아닐까?

한의학 용어 중에 음극사양 양극사음이란 말이 있다. 음과 양은 상대적인 존재로 둘의 총합은 일정하지만 양자의 세력은 서로 커질 수도 작아질 수도 있다. 음극사양이란 음의 세력이 극단적으로 커질 경우 음의 기운은 차라리 양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2002년 대선에서 우리는 승리했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를 밀어오던 어떤 힘이 바닥을 드러내던 중이었으며, 탄핵 후폭풍으로 수구세력이 절단나는 것처럼 보였을 때가 사실은 음극사양의 단계는 아니었는지 되묻고 싶다.

5월과 6월에 걸쳐 지방선거에 출마한 시민후보를 지지해달라는 전화를 돌렸고, 관계하고 있는 시민단체에 후원해달라는 전화도 돌렸다. 결과는? 머쓱했다.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이런 전화를 하느냐란 사람이 많았다. 사실 몇 통화 하지 못했다. 전화를 하면 할수록 자괴스러웠기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의 오만은 사실 우리가 빚어낸 것이다. 민주-반민주의 대립은 끝났다란 생각은, 그를 당선시키는 것이 희망의 일단을 성취하는 것이란 우리들의 바람을 정확하게 반영한 것이다. 노무현의 한계가 우리들의 한계란 사실을, 전화를 걸면서 나는 알게 됐다. 정부 여당에 대한 불신임은 우리들의 희망이 현실과 떨어졌음을, 우리의 희망이 진지한 고민과 회의 없이 급조된 것임을 알아차린 국민들의 심판으로 읽어야 한다.

우리의 한계를 확장하려 노력하고 그 과정 중에 현실과 희망을 접목시키려는 진지한 성찰이 결여된 모든 대안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자들은 불가사리 같은 존재다. 저들은 무엇을 증명해야 할 의무가 없다. 저들은 존재 자체가 레종 데뜨르가 되는 그런 존재들이다. 저들은 자체적으로 후학도 양성하고 권력도 짬짜미해가면서 스스로의 몸피를 불리는 불가사리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정당성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존재다. 개혁과 진보를 희망하는 당신, 당신은 과연 스스로에게 정당한가?

토고전에서 붉은악마가 펼쳐 보인, “보라, 승리를 확인하러 우리가 왔다”란 문구는 그래서 섬뜩했다. 우리가 저번 총선 이후 저들에게 그랬던 것도 같고, 지방선거 이후로 저들이 우리를 비웃으며 펼쳐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음이 극해서 양처럼 보일 때, 뜨거워 보인다고 차가운 약을 쓰면 환자가 죽는다. 환자가 열이 나서 펄펄 끓는다 해도 음극사양이라면 부자나 계지, 인삼처럼 뜨거운 약을 줄 수 있는 의사만이 환자를 살린다. 열린우리당에 그런 눈 밝은 이가 있는가. 우리에게 스스로의 한계를 확장하려는 기꺼운 동의가 있는가. 이것이 대한민국의 개혁이 성공할 것인가를 결정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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