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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4. 28.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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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벗이여 해방이 온다
[오늘 20주기] 김세진·이재호 열사 추모곡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창학(changhack) 기자
이창학 기자는 고 김세진ㆍ이재호 추모가 '벗이여 해방이 온다'의 작곡ㆍ작사자입니다. 컴퓨터 볼륨을 조금 올리세요. 추모가가 흘러나옵니다.
오늘 4월 28일은 고 김세진ㆍ이재호 열사의 20주기일입니다. 20주기 기념식은 4월 29일(토) 오후 2시 서울대 멀티미디어강의동(83동)에서 열립니다.
<편집자 주>
▲
벗이여...
2005년 4월 서울대 교정에 세워져 있는 김세진ㆍ이재호 열사 추모비에 향불과 국화가 놓여져있다.
ⓒ 김세진·이재호 추모사업회
그 날은 오리라, 자유의 넋으로 살아.
벗이여 고이 가소서, 그대 뒤를 따르리니.
그날은 오리라, 해방으로 물결 춤추는
벗이여 고이 가소서, 투쟁으로 함께 하리니.
그대 타는 불길로, 그대 노여움으로
반역의 어두움 뒤집어 새날 새날을 여는구나.
그날은 오리라, 가자 이제 생명을 걸고.
벗이여 새날이 온다, 벗이여 해방이 온다.
벌써 20년인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던데, 그새 강산은 두 번이나 옷을 갈아입었나 보다. 그러나 세월의 더께를 인정하기가 참 힘들다. 모두 그렇겠지만 기억은 아직 뇌리에 선하고, 그 노랫소리들은 귀에 울리고 있기에.
난 부끄러웠다
▲
2주기의 기억
... 88년 4월 28일 김세진·이재호 열사 2주기 추모식을 방해하려고 교문 깊숙히 들어가 최루탄을 쏘고 있는 경찰들.
ⓒ 연합뉴스
81학번인 나는 졸업 후에 문화운동에 뛰어들었다. 학교 동아리 '메아리'에서 하던 일의 연장이기도 했고, 그 땐 그렇지만 내겐 당연한 선택이었다. 전공이 원자핵공학이었지만 졸업 후 첫해에는 감리교청년연합회 문화선교위원회의 노래 팀을 이끌었다. 그리고 김세진·이재호 두 친구가 우리 곁을 떠나던 86년, 난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노래분과 '새벽'을 후배들과 다시 조직하면서 창작·공연 활동에 몰두하고 있었다.
아직도 또렷한 기억. 86년 전방입소 반대투쟁이었다. 두 친구가 우리 곁을 떠난 4월 28일이 월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날 일요일에 TV 뉴스에선 서울의대 점거 농성 기도가 진압되었다는 말로 들끓었고. 그래서 난 서울대의 전방입소 반대투쟁은 그리 끝날 것이라고 별스럽지 않게 생각했다.
그날 4월 28일. 토론 세미나에 정치적 시위나 행사, 그리고 조직적인 창작·공연 활동에 눈코뜰 새 없이 보내던 내게 오랜만의 하루 휴가가 주어졌다. 과천에 살고 있던 나는 못 보았던 책들을 좀 집중해서 읽고 싶어 과천의 도서관에 갔었다. 저녁 늦은 무렵, 커피나 한잔하고 쉬러 나오는데, 잘 알던 서울대 후배들이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서울대생이 시위 도중 자기 몸을 불살랐단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바로 그 날이었다.
광주민주항쟁 다음해인 81년도에 입학한 나로서는 학우들의 죽음이 그리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다. 대학 1학년 때 김태훈 선배의 도서관 투신을 목격했고, 그리고 황정하 선배가 시위를 위해 밧줄을 타고 내려오다가 콘크리트 바닥에 몸이 부서지면서 떠나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그리고 녹화사업으로 군에 죽어간 학생들의 소식들….
하지만 불을 살라 자기 몸을 태우고 절규하면서 떠나간 후배들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정말 괴롭고 슬픈 일이었다. 전태일 열사도 있었지 않은가? 하지만 내겐 좀 먼 이야기였다. 개인적으로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두 후배들이다. 그러나 같은 캠퍼스 아래에서 얼굴 부딪히며 울며 웃고 함께 하던 어느 83학번 후배들과 다름없을 것이라 여겨지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슬픔이 밀려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스스로 사회변혁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난 이런 후배들에 비추어 이 비극적이고 폭압의 시대를 과연 떳떳하게 항거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스스로 많은 반문을 해보고, 뒤돌아보고… 하지만 부끄러웠다.
스스로 짊어진 의무감에 오선지에 매달렸다
ⓒ 김세진·이재호 추모사업회
세진이는 얼마 안 있어 사망했다고 하고, 재호는 온몸의 화상과 싸움중이라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재호만이라도 살아남길 간절히 바랬다. 정말 그랬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노래를 쓰기로 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이었다. 슬픔을 떨칠 길이 없었다. 부끄러움을 가눌 길이 없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변혁되지 않고 있는 세상에 대한 무기력함이 견디기 힘들었다.
정말 처음으로 공연에 필요해서, 무슨 행사에 필요해서가 아닌, 그저 내가 쓰고 싶다는 생각에, 아니 솔직하게는 써야만 한다는 내 스스로 짊어진 의무감에 오선지에 매달렸다.
가슴 위로 밀려넘칠 것 같이 차 있으면서도 내게서 떠나지 않는 슬픔을 표현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거의 한 달의 시간을 이 노래를 위해 쏟아붓고 바쳤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불러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들의 죽음 앞에 이 노래를 헌상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당시 노래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다 그랬지만, 누구에게 음악을 배운 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스물넷의 젊은 치기와 열정으로 매달렸다. 슬픔… 슬픔…, 이것이 화두였다. 못 견디고 뼈에 사무치는 슬픔!
27일 저녁, 어딘가에서 다음날의 시위의 결의를 다지고 있을 재호, 세진이가 되어 보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일의 투쟁은 사수해야 한다.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시너를 자기 몸에 뿌리고 가야쇼핑 근처의 당구장 옥상으로 향하는 두 사람이 되어 보았다. 당구장 옥상으로 향하면서 밀려오는 어머님·아버님의 얼굴, 가깝던 많은 사람과의 이별을 각오하고 영영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먼 길로 가고 있는 두 사람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회한이 밀려왔다. 그리고 마지막 그 자리를 사수하고 대열을 지키기 위해서 경찰들에게 물러나라 절규하면서 시너가 뿌려진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던 세진이와 재호를 생각했다. 그 절박감과 분노와 격정을 떠올렸다. 눈물이,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 격정과 회한의 눈물과 슬픔의 전도사가 되고 싶었다. 떠난 후배들에게. 그 복받쳐 오르던 슬픔만을 생각했다. 그들의 분노와 격정만을 생각했다. 그리고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수놓고 엮어 나갔다. 그렇게 노래는 탄생했다.
벌써 20년... 지금도 난 눈물이 난다
87년 봄 어느 날, 서울대 노래동아리 '메아리' 재학생과 졸업생이 함께 한 행사에 민가협 어머님들이 오셨다. 그 중에는 김세진 어머님이 계셨다. 많은 사람이 있어 인사드릴 기회가 없었다. 2차까지 이어진 술자리 끝에 후배 하나가 와서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세진이 어머님이 이 안에 누군가 노래만든 사람이 있을텐데 인사를 못 하고 간다고, 꼭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하시더라고. 이야기를 전해 듣는데, 눈물이 차올랐다. 그게 고마울 이야기인가? 부끄럽기만 했다. 그리고 슬펐다.
지금도 난 이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곤 한다. 20년 전의 격정과 슬픔이 다시 날 사로잡기 때문이다.
참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던 노래다. 그만큼 세진이 재호의 영혼이 맑고 깨끗했기에 그 영혼의 격렬함과 통한의 맑음이 이 노래를 통해서 전해질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조금이라도 그 열정과 맑음을 노래를 통해서 전할 수 있었다면, '벗이여 해방이 온다'라는 노래는 자기 몫을 어느 정도는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가끔 과연 이 노래는 내가 만든 노래가 맞는가 하고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내가 가진 음악적 능력과 젊은 용기가 던져주던 어설픈 혈기로 만들었다고 하기엔 분에 넘치는 노래 같아서.
이제 20년. 올 추모식에선 눈물 펑펑 쏟으며, 정말 두 분의 영정 앞에서 이 노랠 절규하여 바치고 싶다. 20년간 품어온 마음의 빚을 그렇게 눈물 쏟으면서 조금 갚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두 분 영정 앞에서 그 분들의 뜻에 비추어 그저 그렇게 현실에 발담그고 살고 있는 날 좀 뒤돌아보면서, 속죄라도 구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이 노래를 뜨겁게 다시 바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김세진 열사가 분신 며칠 전인 86년 4월 24일 부모님께 보낸 편지.
ⓒ 김세진·이재호 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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