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4. 21. 12:48ㆍ정치
얼마전 피터 드러커의 기고글들을 모은 책을 다 읽고 덮기 전에, 마음에 남았던 귀절이
떠올라 한번 더 음미하고 책장의 빈틈을 찾아 꽂았다. 피터 드러커와의 인터뷰에 관한 부분이었는데, "당신은 지금까지 많은 책을 썼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어떤 겁니까?"라는 질문이었다.
"다음에 나올
책입니다"
아흔이 넘은 그가 한 대답이었다. 인생을 정리할 나이를 이미 넘었을 수 있는 나이, 과거의 영광에
기대어도 흠이 되지 않을 나이, 그리고 남은 날들 속에서 꿈꾸는 것이 어울리지 않을 나이의 그가 그런 대답을
했다.
어쨌거나 현답이다. 살아있으며, 끊임없이 진보한다. 선언이자 삶의 굳건한 강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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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전용 주차공간 표시는 사실 그것이 장애인을 위한 주차공간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공간이 척 노리스의 자리이며 만약 그자리에 주차하는 사람은 곧 장애인이 될 것임을 시사하는 경고 표지일 뿐이다"라는
농담을 읽으며 키득거리다가 몇번을 클릭하다 "지금의 나는 내 과거의 총합인가"를 묻는 바깔로레아 글을 만나게
되었다.
미래의 꿈꾸는 나를 목표로 오늘을 살아가니까 지금의 나는 내 과거의 총합이지라는 대답을
하다보니, 조금은 초라해진다. 5년전, 10년전, 그리고 더 어린 나이의 내가 이런 나를 상상이나 하면서 그 시절을 보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여 오늘의 이런 내가 되지 않기 위해 투지를 불태우며 오르지 못할 사다리에 메달려 바둥거리진 않았었나?
하루에
대한 기대로 가득차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일어난 아침은 언제적 이야기였지? 소풍갔던 날, 첫사랑에게 고백하기로 마음 먹었던 날, 대학 입시
발표하던 날 그리고 무슨 날 무슨 날, 순 과거형으로만 표현되는 아득한 기억들 틈에 오늘이 없다. 오늘은 늦잠자고 찌뿌둥하게 일어났고, 마치
거울처럼 어제와 아주 흡사하지만 어제와 완전히 단절된, 그래서 내일도 오늘과 아주 흡사하겠지만 내일을 꿈꾸며 오늘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계단이
되어주지 못한 그런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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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에게 그리스는 조상의 영광을 팔아
연명하는 파렴치였으며 로마의 영광을 더욱 빛내줄 어둑한 배경이었다. 지난 날의 영광과 성취에 기대어서 살아가는 내 시대의 수많은 위인들은 누구를
빛내줄 어둑한 배경이지는 않은 것 같고, 그럴 의향도 없을 테고, 여전히 그리고 당분간 먹힐 카드라는 걸 굳건하게 증명하고 살아가는 모습에
흔들림이 없어 보인다.
왕년의 나는 군살없는 몸매와 첫인상을 각인시키는 초롱초롱한 눈망울, 그리고 당찬 언변과
왕성한 호기심, 장난기로 가득찼었지만, 이런 왕년이 기대어 영광과 성취의 유물을 팔아먹고 살 만한 것이 되지 못한 채, 그리하여 결국은 골방의
모니터 앞에서 등 굽히고 있는 내 모습을 우울하게 만들기만 한다.
내 시대의 많은 위인들과 나의 또다른 차이가 있다면,
당신이 이룬 많은 것들 중에 가장 훌륭한 일은 어떤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지금 하는 일입니다' '다음에 할 일입니다'라고 대답해줄 것을 기대하는
나의 똘망똘망한 눈망울과 그런 나를 보지 못할 정도로 멀어버린 그들의 탁한 눈빛일 게다.
시간은 언제나 부족한 법이
없고, 또 남는 법도 없다. 넘치는 시간을 감당하지 못해 쩔쩔매거나 부족한 시간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만이 변할 뿐이다. 사람이 진보하고, 사람이
타락하고, 사람이 처음처럼 지금까지 어리석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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