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금강-도종환

2014. 2. 20. 20:33관심사

겨울 금강

 

도 종 환

 

오늘도 걸어서 강언덕까지 갔다 왔다

들에 이미 와 기다리고 있던 바람에 금세 귀가 얼었고

산을 끼고 도는 길마다 빙판이었다

어느새 십년 세월이 흘렀다 이 길에 나선 지

몇은 죽고 떠난 사람도 여럿 되었다

많은 이들과 헤어졌고 더 많은 이들을 새로 만났다

그래도 늘 같은 소리로 우리 가는 길 옆에 있어주던 강물이

오늘은 작은 시냇물까지 다 데리고 나와 동행해 주었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억새들이 모여주었다

 

한때는 내 입에서 쏟아지고 있는 말들이

내일이라도 금방 현실이 되어 우뚝 설 것 같았고

넘치는 열정으로 해도 달도 다 내 가슴에

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다시 못 만날지 모르는

그런 뜨거움으로 밤을 새우는 이들 많아서

별이 빛났다 크나큰 몇번의 실패로

많은 이들이 떠나고 이제는 옆에 섰던 이들마저

먼발치로 물러나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들으면서

내 손을 놓고 쏜살같이 앞질러가며

우리는 세상을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

보란 듯이 몸바꾸는 이들도 보면서

그래도 나는 이 길을 걷는다

 

이루지 못했으나 잘못 살지는 않았다

어쩌면 갈라진 이땅 더러운 시대에 태어난 내가

갈 수밖에 없는 가지 않고는 달리 길이 아니던

나는 그런 길을 걸어온 것뿐이었다

그 더운 가슴이 식고 박수소리 또한 작아져

몇은 풀이 죽었지만 애당초 박수소리 때문에

몸 던진 길이 아니었다

떠나던 이가 던진 말처럼

유연해져야 한다고 나도 그 충고를 받아들이지만

떠날 수 없다

 

눈물이 떠난다는 생각을 얼핏 떠올렸을 때

얼마나 눈물이 쏟아지던지

애착이나 억울함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부정하고 부정해도 끝내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마음 하나 아주 여리고

아주 작던 그래서 많이도 고통스러웠던

지금까지 나를 끌고 온 그런 것 하나를

역시 버릴 수 없어서 아팠다

 

오늘도 걸어서 강언덕까지 갔다 왔다

어린 금강 줄기 백년도 한순간이던 강물

처음 이 길에 나설 때 우리의 언약을 알아듣던 그 강물

유장해야 한다고 오래오래 깊이깊이

가야 한다고 내가 흔들릴 때마다

내 몸의 잘디잔 실핏줄 하나에까지 흘러와

그물처럼 나를 휘감던 강물

 

그곳에서 다시 눈발이 치고 눈보라가 마른 다리를 때렸다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것 없으나

어떤 하찮은 것도 쉬이 이루어지진 않으리니

나는 멈추지 않으리라

고통도 좌절도 허기도 수천 수백 눈망울도

반짝이는 아침 햇살로 바꿔 안고 흐르는 강물의

저 무량한 깊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가는 강물의 저 빛나는 발걸음

어떤 것도 쉬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나는

멈추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