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미완’ 사법개혁 - ④ ‘문재인의 운명’으로 되돌아본 오해와 진실
검찰개혁이 화두다. 국회 사법제도개선특별위원회(사개특위)가 내놓은 검찰개혁안을 두고 검찰과 정치권의 줄다리기가 한창이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폐지, 검·판사 수사전담 조직 신설,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 등이 쟁점이다.
여전히 검찰의 저항이 거세다. 검찰개혁이 또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 어떤 개혁과제보다 험난하기만 했던 사법개혁 논의는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거치면서 구체화됐다. 당시엔 개혁방안 제시에 머물렀다. 지지부진했던 사법개혁은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금 현안으로 등장했다.
참여정부 사법개혁의 계기
참여정부의 사법개혁 하면 2003년 3월 9일 노무현 대통령이 평검사들과 직접 대화하던 장면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다. 검찰인사 개혁안에 대한 검사들의 오해와 불만을 해소하는 것과 함께 검찰의 정치적 중립화를 공개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본격적인 사법개혁 추진은 그로부터 몇 달 뒤였다.
사실 사법개혁은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공약 사항이 아니었다. 인수위원회에서 선정한 국정개혁 과제에도 들어있지 않았다. 참여정부의 사법개혁은 어찌 보면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 것이었다. 정부출범 초기 대법관 임명에 즈음해 대법원 구성의 다양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전면적인 사법개혁 요구로 확대됐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계기는 역사의 역동성이 만들어줬다. 참여정부의 개혁성이 각 분야에 불러일으킨 기대가 만들어낸 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03년 8월, 이른바 ‘대법관 파동’이 있었다. 대법관 추천 문제로 청와대와 대법원이 상당히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당시 법조계 안팎에선 대법관-헌법재판관 구성에서 인권, 여성, 소수자 보호 등 사회다양성이 보장하도록 요구하는 여론이 높았다. 젊은 법관들 사이에서도 연공서열이 아닌, 개혁과 변화의 지향을 담은 다양성의 정신이 인사에 반영돼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노 대통령이 늘 강조했던 방향이기도 했다. 대법원장이 신임 대법관 후보를 제청하기 위해 인선작업을 시작할 때,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이 대통령 뜻을 대법원측에 전달했다. 인권, 여성, 소수자 보호 등 어느 쪽이든 대법관 구성의 다양성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제청해주길 바라는 것이 대통령의 뜻이라고 했다.
최초 여성 대법관의 탄생
그런데 대법원에선 다른 쪽 이야기를 듣고 대통령의 뜻을 잘못 이해했는지, 그만 전통적으로 해오던 연공서열 방식으로 후보를 제청했다. 큰 반발이 생겼다. 대법관 추천회의에 참석했던 강금실 법무부 장관과 박재승 대한변호사협회장이 반발해 퇴장했다. 재야 법조계는 물론 소장 판사들도 문제를 제기했다. 일부 소장 판사들은 인터넷 연판장을 돌리는 등 집단적 의사표시에 나섰다.
현실적으로 대법원장이 제청을 철회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양성 정신이 반영되지 않은 대법관 제청을 대통령이 그냥 수용할 수도 없었다I. 대통령이 만일 제청을 거부하면 법원은 사상초유의 사태를 맞아 극심한 진통을 겪게 될 것이었다. 그런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윤관 전 대법원장이 중재에 나서 법원과 의논한 방안을 문재인 민정수석에게 제시해왔다.
“대통령이 마뜩치 않더라도 이번 대법관 제청을 받아주시면 첫째, 대법원이 앞장서서 청와대와 함께 사법개혁을 추진하겠다. 둘째, 대법원장에게 추천권 있는 다음번 헌법재판관 후보추천부터 시작해 다음 대법관 제청을 다양성의 기준으로 하겠다. 그리고 전국 판사회의를 소지해 의견수렴과 함께 차기 헌법재판관 인사와 대법관 인사를 다양성의 기준으로 할 것을 공개적으로 약속하겠다.”
법원쪽 의지가 확인된 뒤 그 방안은 수용됐다. 우리나라 최초 여성 헌법재판관, 최초의 여성 대법관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대법관과 헌법재판관의 다양한 구성을 위한 노력은 꾸준히 진행돼 참여정부 기간에 큰 진전을 이뤘다. 한나라당의 정략적 반대로 좌절됐지만, 최초 여성 헌법재판소장 후보까지 나왔다.
절반의 개혁, 미완의 과제
한편으로 2003년 10월 여러 번의 사전논의 끝에 대법원과 청와대가 ‘사법개혁위원회’를 구성해 사법개혁 대장정에 들어갔다. ‘사법개혁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사개위에서 논의한 방안을 입법화하는 작업을 했다. 이를 통해 로스쿨, 국민참여재판, 공판중심주의, 법조일원화 등을 법제화했다. 사법제도는 크게 선진화됐다.
그러나 대법원의 정책법원화, 고등법원 상고부 설치 등의 법원개혁은 추진하지 못했다, 군(軍)사법개혁도 방안까지 만들고 시간이 부족해 입법화하지 못했다. 특히 중수부 폐지,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 등 검찰개혁 핵심과제는 무산됐다. 참여정부 사법개혁이 ‘절반의 개혁’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문재인 이사장은 책 <운명>에서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를 추진하지 못한 것을 매우 아쉬워했다. 개인적으로는 ‘검경 수사권조정’ 문제를 사법개혁 틀에 넣어서 사법개혁과 함께 추진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 경찰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으로 시민사회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국회 벽에 막힌 공수처 입법도 지원해주지 않았다. 정부만 애를 쓰다가 못하고 말았다.
검찰개혁 실패, 참여정부만의 책임인가
참여정부는 검찰의 중립성과 독립성을 최대한 보장해줬다. 검찰내부의 의지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지만, 대통령과 정부는 스스로의 의지와 절제로 그렇게 했다. 시민사회가 요구한 개혁과제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 순식간에 참여정부 이전으로 돌아갔다. 참여정부가 보장해준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우리 사회가 지켜내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도 진보·개혁진영에서는 참여정부가 검찰개혁에 실패했다고 말한다. 문 이사장은 이에 대해 “참여정부 때 검찰개혁을 더 많이, 또 더 근본적으로 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참여정부의 책임인 양 한마디로 규정해 버리면 과연 온당할 평가일까?”라고 되물었다.
사그라지던 사법개혁의 불씨는 2009년 5월 재점화됐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가 계기였다. 검찰을 장악하려 하지 않고 정치적 중립과 독립을 보장해주려 애썼던 노 대통령이 바로 그 검찰에 의해 정치적 목적의 수사를 당했던 것이다. 민주당이 검찰개혁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사개특위 발족으로 이어졌다. 여야가 검찰개혁의 핵심인 ‘대검 중수부 폐지’에 합의했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검경 수사권 조정은 경찰의 수사개시·진행권을 인정하면서도 검찰의 수사지휘권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참여정부가 성공하지 못한 검찰개혁. 노무현 대통령의 비통한 죽음으로 다시 시대의 과제가 되어 우리 앞에 놓였다. 이 미완의 과제를 완성하는 것은 누구의 몫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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