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정신을 지키기 위해 모인 ‘인간문화재’들
"이것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인간문화재들이 다 모였는데 이럴 때 사진이라도 찍어 놔야지."
황지우 시인(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이 마지막으로 녹음장소에 들어서고, 이창동 감독(전 문화부 장관)을 맨 앞으로 막 녹음작업이 시작되려는 순간 불현듯 유홍준 교수(전 문화재청장)가 자신의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든다. 그러고는 참가한 이들을 한 사람씩, 두 사람씩 무작위로 찍어댄다.
무엇이든 기록으로 남겨 놓으려는 학자의 '기록본능'에서 그런 건지, 다른 쓸데가 갑자기 생각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유 교수 포함, 이런 정도의 문화계 '거물인사'들이 홍보방송을 위한 녹음작업을 위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누구나 사진으로 남겨놓을 생각이 들 만큼 특이하기는 했다. 이것이 노무현재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노무현정신을 지키고 가꾸어 나아가야겠다는 각별한 결의가 없었다면 물론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 분들 중 어떤 분들끼리 무슨 특별히 친밀한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겠다. 다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녹음실에 들어서면서 반갑게 악수하고 곧장 농을 주고받으며 누구랄 것 없이 떠들썩하게 자리를 흥겹게 만드는 것을 보면 대가들끼리의 거침없는 여유인 것 같기도 하고 세상과 역사를 같은 방향에서 보는 동업자들(?)끼리의 티없는 반가움인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이명박 정권 들어 크든 작든 갖가지 고난을 겪은 이들끼리의 이심전심 동지애인가?
“우리가 너무 잘 하면 안돼..”
출연자들은 일찍부터 녹음실 한 귀퉁이에 자리잡은 한명숙 이사장의 격려 속에 한 사람씩 부스에 들어가 탁현민 연출가(한양대 겸임교수)의 지시 아래 녹음을 시작했다. 재단 홈페이지에 '노무현사랑법'을 연재하고 있는 정철 카피라이터가 준비한 여러 카피 중에서 자신들이 각자 선택한 것을 낭독하는 형식이다.
'문열이'의 고통은 이창동 감독이 자청했다. 다른 약속시간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부스에 들어 간 이 감독은 "목소리를 좀 더 밝게 해 달라"는 탁현민 연출가 요청에 "난 원래 목소리가 그렇다"고 극구 변명하면서도 몇 번이고 "이번에는 좀 나아졌나""이번에는 좀 나아졌나"는 혼잣말 속에 녹음을 거듭했다.
간신히 합격사인을 받고 부스에서 탈출한 이 감독은 곧 "감독이란 사람이 그것밖에 못하느냐"는 유 교수의 핀잔을 받고는 "막상 저기 들어가 앉으면 잘 안돼"라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난 그래도 어두운 버전이 더 좋은 것 같은데…"라고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두 번째로 부스에 들어 간 유홍준 교수는 처음부터 모범생 버전으로 나가기로 작심한 듯했다. 카피를 읽다가 실수를 한 듯싶으면 본인이 먼저 "다시 할게요" 자수를 했고 탁현민 연출가가 목소리 톤을 바꾸라 지시해도 "네!", 다시 한번 천천히 해 보자고 해도 "다시 해요? 네"하면서 아주 공손하게 임무를 마무리했다.
부스를 나와 아쉬움을 표하는 그에게 이창동 감독은 “앞으로 연예인들이나, 말을 업으로 하는 전문가들도 할 텐데 우리가 너무 잘 하면 안 돼”라고 위로의 말을 던졌으나 옆에 있는 이들은 그 말을 이 감독 스스로에게 하는 위로라고 여겼다.
황지우 시인이 "시인들은 원래 낭송을 잘하지"라고 감탄했고 유홍준 교수가 "프로가 하는 게 다르네. 도종환 니가 다 해라"고 질시어린 칭송을 할 정도로 안도현 시인과 도종환 시인은 서너 번 만에 녹음을 깔끔하게 마쳤다.
황 시인의 녹음을 듣자마자 터져버린 울음
하지만 이날 녹음작업의 최대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황지우 시인이 장식했다. 황 시인이 원래 선택한 카피는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로 ‘미안합니다’를 다섯 번 반복하는 것이었다.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컸지만 자칫하면 굉장히 단조로운 카피로, 정철 카피라이터 자신도 전문 연예인용으로 준비한 것이라 했고 스스로 이것을 선택한 황시인도 부스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잘못 택한 거 같다"고 후회할 정도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딱 처음 연출가의 큐사인이 떨어지자마자 "미안합니다…"를 탄식하듯 애절한 음정으로 읽어가던 황 시인이 마지막 부분에서 원고에도 없던 "…그리고 보고 싶습니다"를 말했다. 녹음실 안에는 전율을 느낄 만큼 순간적인 정적이 흘렀다. 더 이상 녹음을 계속할 이유가 없었다. 대시인의 저력과 순간적인 감정이입이 대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잠시 후 누군가 "황 시인이 여러 사람 울리겠는데…"라는 농담조 말로 착 가라앉은 분위기의 반전을 시도했으나 아무도 그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제로 이튿날 재단에서 열린 상임운영위원회에서 진행상황을 설명하고 녹음을 품평할 기회를 가졌는데 조기숙 상임운영위원이 황 시인의 녹음을 듣자마자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노무현’이 남긴 숙제
출연자들은 예정보다 훨씬 빠른 한 시간여 만에 녹음을 모두 끝낸 후 집단 인터뷰에서 행사에 참여한 동기, 이 엄혹한 시대에서 왜, 어떻게 노무현정신을 지켜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소회를 피력했다. 한결 같이 노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갖고 한번 신뢰를 가지면 끝까지 감싸주고 신뢰하던 대통령"(유홍준), "딸아이 손잡고 슈퍼에 칫솔 사러 가는, 자전거에 손녀 태우고 이웃집 가는 그런 대통령"(도종환), "바로 옆에서 같이 숨쉬고 대화하고 농담했던 보통사람으로써의 대통령"(황지우)을 회고했다. "죽음에 있어서까지 원칙을 지킨 패배의 길을 택함으로써 멀리에 있는 모두의 승리를 기약했던 그"(이창동)가 남긴 숙제가 큰 만큼 노무현재단을 중심으로 작은 동력이라도 보태야 한다는데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고 했다.
안도현 시인은 "노무현 대통령을 서거 직전 3월말 봉하에서 딱 한 번 만나 뵌 적이 있는데 여전히 뜨거운 열정을 지닌 분이구나, 그리고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분이구나 하는 느낌을 갖고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 때 많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사과나무를 심고 싶다고 하셔서 내가 사는 고장의 사과나무 묘목 스무그루를 보내드린 적이 있다"는 비화를 소개하며 "그 나무를 꼭 심으셨을 텐데 그동안 얼마나 잘 컸는지 보고 싶다"고 말했다.
황지우 시인은 "대표적인 노무현정신은 권력을 움켜쥔 게 아니라 나눴다는 것이며 모든 결정을 시민사회 스스로 할 수 있게 자율성을 부여한 것"이라며 "이것들이 현 정부 들어 반납당하면서 자율이란 것이 얼마나 고귀한 것이었나는 것을 알게 됐는데, 스스로 뜻을 세우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율성을 되찾는 것이 이 시대 노무현정신의 핵심"임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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