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1. 10. 16:49ㆍ관심사
[경제원로에게 길을 묻는다] <1> 박승 前 한국은행 총재
한국일보 | 기사입력 2008.11.10 02:40
"부유층 감세 대신 세금 제대로 거둬 공공지출 늘려야"
지방에 세금 인하 등 파격적 유인책을
韓美 FTA·금산분리 완화는 해도 좋아
부동산 악순환 담배 끊듯 고통 견뎌야"
세계경제는 지금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격변기에 들어섰다. 한국경제도 그 소용돌이에 휩싸였음은 물론이다. 정부는 단기적으로 금융 혼란과 경기 침체를 벗어나고, 장기적으론 변화하는 글로벌 경제질서 속에서 생존과 도약의 길을 찾아야 하는 힘든 과제에 직면해있다. 경제 원로들에게 그 해법을 들어본다.
해박한 지식, 정연한 논리, 늘 확신에 찬 말투까지. 박 승(72) 전 한국은행 총재는 예전 그대로였다. 한은 총재를 끝으로 정책일선에서 물러난 지 2년 반이 넘었지만 그는 현재의 경제흐름과 문제점을 정확하고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박 전 총재는 "지금 서민생활고는 외환위기 때보다 훨씬 심각하다"며 "하루빨리 정부는 정책방향을 수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 다들 어렵다고 합니다. 정말로 IMF때만큼 심각한 건가요.
"지금 국가부도 위험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민생고는 10년 전보다 지금이 더 심각해요. 양극화, 빈부격차가 훨씬 벌어졌기 때문이지요. 투자를 기피하고 공장은 외국에 세우니 고용 없는 성장이 됐고, 그러다 보니 대기업은 잘 되는데 중소기업, 자영업자, 농민, 실업자는 침몰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경제가 전체적으로 4% 성장을 해도 대기업은 20% 성장하는 반면, 자영업자는 -3%로 추락하는 꼴입니다".
- 이명박 정부는 이 문제를 성장으로 해결하겠다고 하는데요.
"성장우선 정책은 경제가 정상일 때 가능한 정책이에요. 대기업은 투자하게 하고 부유층이 지갑을 열게 해 고용을 늘리고 민생을 해결하겠다는 얘긴데, 하지만 지금은 친기업 정책을 써도 민간투자가 늘지 않습니다. (성장 분배의 문제가 아니라) 수지타산이 안 맞으니까 투자를 안 하는 거예요. 부자들도 소비를 늘리지 않을 겁니다. 결국 경제 살리기 효과는 없는 반면, 빈부격차만 심화 시켜 민생을 더 어렵게 할 소지가 다분합니다. 지금 필요한 건 그래서 민생우선 정책입니다"
- 민생우선이란 말이 좀 모호하지 않나요. 서민들에게 돈이라도 뿌려주는 말씀은 아닐테고.
"현재 성장정책 가운데 민생과 역행하는 정책은 유보하거나 철회하라는 얘깁니다. 종합부동산세 완화, 수도권규제 완화, 부유층 중심의 감세정책 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죠. 대신 민생과 직접 관련이 없는 정책은 추진해야 합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나 공기업 개혁,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금산분리 완화 등은 그대로 가도 좋습니다".
- 정부는 감세가 소비를 늘릴 거라고 하는데요.
"천만에 말씀. 감세정책은 특히 전면 재검토해야 합니다. 감세를 하면 무엇보다 재정적자를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재정수요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 그래도 투자나 소비는 좀 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감세를 통한 민간소비나 투자증대 효과는 매우 낮습니다. 세금을 줄여주면 부자들이 지출을 늘릴 것이라고 하는데 모르는 소립니다. 부자들은 원래 소비성향이 낮아요. 소득세 인하처럼 꼭 필요한 부분은 빼고 종부세, 증여세, 상속세 같은 부유층에 혜택이 집중되는 감세는 특히 철회해야 합니다."
-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금을 줄이지 말고 제대로 거둬서 공공투자 지출을 늘리는 게 경기부양에는 더 유용합니다"
- 특히 종부세 폐지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히셨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총재님도 대상자이실 텐데.
"저는 30년 전부터 부동산 보유과세 강화를 주장해 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종부세는 대단히 훌륭한 제도입니다. 내가 그 대상자이지만 기꺼이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종부세 도입 전까지 우리나라의 부동산 보유과세율은 부동산 시가의 0.2% 수준이었습니다. 이게 현재 미국은 1.5%, 일본은 1.3% 정돕니다. 종부세 도입으로 0.2%를 0.6%로 내년부터 올리겠다고 한 건데요. 보유세 부담을 높이면 집값 안정의 장기적 장치가 되고 집을 투기수단으로 삼는 것도 억제될 겁니다. 개인저축의 70%를 부동산에 넣고 있는 한국 사회는 금융자산이 산업자본으로 쓰이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종부세는 그래서 한국이 부동산 중심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라고 봅니다".
-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종부세가 세계에도 유례가 없는 징벌적 과세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빈부격차는 소득불균형이 아니라 자산불균형에서 옵니다. 소득은 상위 10%가 전체의 25%를 벌지만, 부동산은 상위 10%가 전체의 40%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동안 한국에 소득재분배 기능은 있었지만 자산재분배 기능은 없었어요. 그게 바로 종부세입니다. 소득세도 국민의 절반은 안냅니다. 상위 2%만 내는 종부세도 이상한 건 아니죠. 굳이 손을 대겠다면 기준을 6억원에?9억원으로 올려 대상자를 줄이지 말고, 3억원으로 내려 부담자를 늘려서 제2의 재산세로 만드는 것이 국가발전에도, 법질서에도 맞다고 봅니다".
- 종부세 기준을 오히려 낮추자구요? 파격적 발상이신데요…아무튼 곧 헌법재판소에서 이 문제를 다룰 텐데 어떻게 보시나요.
"헌재가 세대합산 원칙은 지켜줘야 합니다. 부동산은 소득과 다릅니다. 소득은 나눠 쓸 수 있는 개인재산이지만 부동산은 나눌 수 없는 공공재산입니다(그는 이를 각각 '가분적 개인재'와 '불가분적 공공재'라 표현했다). 소득은 개인의 노력에서 나오니 세금도 개인별 부과가 마땅하지만 부동산은 부동산 자체에 세금을 매기는 게 맞습니다. 자동차처럼요. 몇 명이 공동소유했든 자동차세는 자동차에 매겨지지 않습니까. 부동산도 그래야 한다는 거죠. 헌재에서 이런 경제적 측면을 고려해줬으면 합니다".
- 정부가 지난 주 경기부양책을 발표했습니다. 너무 건설경기, 토목경기 부양 위주 아닌가요.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도 있죠. 하지만 우리 사회가 또다시 부동산 악순환에 빠질까 걱정입니다. 부동산 투기가 일어나면 정부가 규제를 강화합니다. 그래서 집값이 안정되면 슬슬 건설경기가 침체합니다. 그럼 정부가 규제를 풀고 또다시 투기가 일어나는 식입니다. 우리 현대사는 정확히 이런 악순환의 반복이었죠".
- 그 악순환을 끊을 방법은 없을까요.
"담배를 끊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고통 없이는 안되는 거죠. 집값 하락에 따른 시민들의 불만, 침체로 인한 건설업체 부실화를 견뎌내야 합니다. 지금 선진국의 집값은 고점 대비 20~30% 떨어졌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보합 수준입니다. 아직 고통조차 없었다는 얘깁니다. 버블세븐 같은 급등지역 집값은 오른 것의 절반은 떨어져야 맞다고 봅니다. 급락은 막아야겠지만 전국 평균으로도 10~20%는 떨어진 뒤 그 수준으로 유지되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그 가격에 국민과 건설업체가 적응해야 악순환이 끊어집니다.
- 건설사들이 못 견딜텐데요.
"그렇겠죠. 대신 건설업체의 고통은 정부의 공공투자로 어느 정도 도와주면 됩니다."
- 수도권 규제완화 얘기 좀 해보지요. 여당 내에서도 시끄럽던데.
"눈 앞의 이익을 위해 나라의 백년대계를 그르치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국정철학의 빈곤입니다. 우리나라 선진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원인이 수도권 과밀화와 지방 황폐화라는 사실을 정책 입안자들은 알아야 합니다. 주택난도, 환경문제도, 교통난도, 교육문제도 모두 수도권 과밀에서 비롯됩니다".
- 그럼 수도권 규제를 계속 묶어두자는 말씀이신가요.
"수도권이 아니라 지방에 초점을 둬야죠. 무엇보다 지방을 살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지방에도 소득을 줘야 하고 교육의 기회균등을 줘야 합니다. 지방의 세금을 수도권의 절반으로 깎아줄 수도 있어요. 지방의 대입차별도 없애야 합니다. 수능 성적보다 내신 중심으로 대학 선발을 하는 게 방법입니다. 과거 교수시절부터 거의 모든 연구조사 결과를 보면 대학 입학후 성적은 수능보다는 내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 끝으로 현 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으시다면.
"지나치게 단기적 시각으로 모든 문제를 대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근시안적, 임기응변적 대응으로는 당장 위기는 모면할 지 몰라도 나중에 큰 화를 부릅니다. 대통령의 실용주의가 이런 근시적 정책과 연결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듭니다".
◆ 박승 전 총재는
경제학 교수부터 청와대 경제수석, 건설부 장관, 한국은행 총재까지 두루 거친 한국 경제발전의 산 증인이다. 건설부장관 시절 분당ㆍ일산 등 5개 신도시를 입안했고 총재 때는 금융통화위원회의 독립적 위상을 높였다는 평을 받는다.
◇ 약력
▲1936년 전북 김제 생 ▲이리공고ㆍ서울대 경제학과 졸 ▲1961년 한국은행 입행ㆍ조사부 과장 ▲1976~2001년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1986년 금융통화운영위원 ▲1988년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1988~1989년 건설부 장관 ▲1993~1996년 대한주택공사 이사장 ▲1997년 교통개발연구원 이사장 ▲2001년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민간위원장 ▲2002~2006년 한국은행 총재
정리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사진 박서강기자 pindropp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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