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전 국민에게 무료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NHS 체계를 갖춘 나라로 유명하다. 지난 7월, NHS는 창립 60주년을 맞았다. 국가가 국민의 의료를 책임지고 세금으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영국의 경험이 한국에 전하는 교훈은 무엇인지 전용호 통신원이 3차례에 걸쳐 짚는다. 1편에서는 NHS의 역사와 의미를 짚고, 2편에서는 영국 의료 시스템을 겪어본 경험을 한국에서 겪은 의료 체계와 비교, 분석한다. 이를 바탕으로 3편에서는 영국의 경험에서 한국이 배워야 할 점을 전한다.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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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당시의 초기 NHS 모습. |
ⓒ B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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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좋은 점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않고 영국의 무료 의료 시스템 NHS(National Health Service, 국가보건서비스)을 꼽을 것이다.
영국 국민에게 뿐만 아니라, 나 같은 외국인도 '6개월 이상 거주해도 좋다'는 영국 정부의 승인만 받으면 의료 서비스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유롭지 않은 유학생으로 생활하고 있지만, 최소한 영화 <식코>에 나오는 미국인들처럼 비참하게 살지는 않을 것이라는 든든한 희망이 있다. 어떤 질병에 걸리든 엄청난 고액의 난치병이 아닌 이상 NHS에서 무료로 치료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NHS의 역사는 영국 사람들의 핏속에 흐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처럼 NHS 조산원(Midwife)의 손에 태어나서 죽음의 문턱에 이를 때까지 NHS는 영국 국민들과 늘 함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8년 탄생한 NHS는 지난 7월 창립 60주년을 맞았다. 그 기간 동안 영국인들의 건강을 책임져온 NHS는 영국의 자랑이자 중요한 자산이 됐다. 가난할지라도 영국 국민은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치료를 받아야 할 때 비용을 걱정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주의적 공공 시스템이 어떻게 첨단 자본주의 국가에서 반세기 이상 유지될 수 있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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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NHS 설립 당시 가정에 배포된 NHS에 관한 리플릿. |
ⓒ 가디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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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에서 무덤까지, 영국인 곁에 있는 NHS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45년 7월 정권을 잡은 노동당 정부는 취약한 의료 현실에 주목했다. 당시 병원은 2700개 정도로 자선 단체나 지방정부 소속 병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전쟁이라는 위기의 심각성에 비해 의료 시스템은 만성적인 적자와 저투자 등 때문에 매우 취약했고 시설 등도 부족했다.
그 때문에 유명한 윈스턴 처칠 총리도 한 때 NHS를 검토했지만(1942년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주창한 비버리지 보고서가 나오자, 처칠은 조세에 기반을 둔 국가 중심 의료 체계의 실현 가능성을 검토했다) 이를 실행한 것은 그 후임인 노동당의 애틀리 총리였다. 애틀리 총리는 국가가 운영하는 무료 의료 시스템을 구축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추진했다.
이 정책은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를 얻었지만 의사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당시 의사였던 마크는 자서전을 통해 "정부가 의사를 일반 공무원처럼 채용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느껴져 의사들이 싫어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보건성 장관이던 베번이 "의사들의 입을 금으로 채웠다"고 훗날 말했을 정도로 영국 정부는 의사들의 요구를 대폭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타협을 이뤄, 가까스로 NHS를 출범시켰다. 이 협상에서 일반 의사(GP, General Practitioner)는 소규모의 민간 형식으로 진료를 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는 한편 정부로부터 많은 보너스를 약속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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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HS 설립 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한 당시 보건성 장관 베번. |
ⓒ www.nhs.u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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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 의료에 제동 걸려던 대처, 국민 저항에 결국 항복
NHS 어떻게 운영되나 |
기본적으로 일반 의사(GP)가 NHS와 계약을 맺고 진료하는 방식이다. NHS에 속한 GP는 자기 지역에서 관리하는 시민의 수(NHS 카드 발급 수)와 처방전 작성 비용, 왕진비 등에 따라 수입을 얻는다.
지역에 고정된 GP를 고객이 이용하게 한 초기와 달리, 현재 NHS는 고객이 GP를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서 GP들을 경쟁시키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GP들은 2~3명이 공동 개업해, 관리하는 시민 수를 늘리는 등의 방식으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NHS에 속하지 않은 민간 의료 영역도 존재한다. 별도로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한 사람은 보험료를 내고 그 보험회사에서 운영하거나 지정한 병원을 이용할 수 있다. 별도로 비용 부담을 하는 만큼, NHS보다 시설이 더 좋은 경우가 일반적이다. 기존 NHS 내에서도 비용을 내고 사용하는 침실이 있다. 이러한 비율은 전체 국민의 약 20% 정도 된다. |
NHS는 높은 인기 덕분에 첫해부터 당초 예상 비용인 1억3200만 파운드를 훨씬 초과하는 3억 파운드가 집행됐다. 비용이 급증하면서 보건성 장관 베번은 결국 사임했고, 보수당 정부가 1951년에 집권하면서 치과 치료와 안경을 맞추는 비용을 개인 부담으로 바꿨다. 지금도 이 시스템은 유지되고 있다.
1960~70년대에는 심장이식 수술이 시행되는 등 의료 수준이 높아졌다. 특히 관상동맥 우회로 심장 이식 수술의 경우 미국보다 10배 더 많이 시행됐다. 약학·의학 등 의료 관련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국민의 요구와 기대가 높아지면서 NHS 유지를 위해 필요한 의료비용은 눈덩이처럼 증가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마가렛 대처의 보수당 정부는 조세로 운영 자금을 충당하는 구조를 바꾸는 방안을 검토했다(대처 정부는 무상이 아니라 사용자가 일부 비용을 부담하는 보험 방식으로 바꾸는 데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이 계획이 외부에 알려지자 국민들은 거세게 저항했고 결국 대처 총리는 1983년 "NHS는 우리 손안에 안전하게 있다"며 사실상 항복했다. 그 후 대처는 전면적으로 개편하는 대신 시장 원리를 일부 도입, 의사들이 고객 확보를 위해 서로 경쟁하게 하고 이를 수입과 연결시키는 내부 시장 구조를 만들었다.
블레어, 대대적 예산 확충-긴 대기 시간 문제 개선
NHS는 이처럼 발전하면서도 정권의 부담거리였다. 늘어나는 비용뿐 아니라 빗발치는 민원 때문이었다. 특히 중증환자를 중심으로 수술 등 본격적인 치료를 받기 위해 대기하는 시간이 너무나 긴 것이 가장 고질적인 문제였다. 언론에는 "기다리다 지쳐서 환자들이 죽어간다", "수술을 받으려면 몇 달 이상 걸린다"는 기사가 자주 보도됐다.
토니 블레어 총리는 이 문제를 NHS의 중요 해결 과제로 선정하고, 대기시간 줄이기와 서비스 질 관리를 위해 힘썼다. 블레어는 의료 서비스를 가장 중요한 공공정책 의제로 삼고, 임기 동안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블레어는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 민간을 적극 활용하는 등 시장친화적인 조치를 취했지만, 그와 동시에 NHS 관련 예산도 대폭 늘렸다. 그 결과, 지난 5년간 NHS의 정부 예산은 두 배가 늘어서 무려 1천억 파운드(약 200조 원, GDP의 9% 수준)를 넘어섰다.
주간 <옵저버>는 최근 NHS 60주년을 기념한 기사에서 "NHS의 의료 서비스가 10년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며 "이 서비스를 고안한 사람들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정교한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다"고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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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HS 60주년 기념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는 알란 존슨 현 보건부 장관. |
ⓒ http://www.flick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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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S 인력 130만 명... 정부 추진력과 국민 지지의 합작품
이처럼 NHS는 부침을 겪긴 했지만 역대 정권을 거치면서 계속 발전해왔다. NHS의 고용 인력은 무려 130만 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용 인력을 거느린 공공 기관 중의 하나다. 의사, 간호사, 컨설턴트 등 핵심 인력의 수가 지난 60년 동안 5배나 늘었다.
NHS는 예산의 효과적 사용과 고객 욕구 충족이라는, 다소 상충하면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예산 낭비를 방지하기 위해 의사의 과잉 진료, 과잉 처방 등을 막기 위한 각종 가이드라인을 제시했고, 환자 상태에 따라 치료의 우선순위를 정했다. 또한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학문적 연구가 NHS를 중심으로 이뤄졌고 정부·간호사·의사·학자 등은 NHS의 효율적 운용을 위해 치열하게 논의해왔다.
유지 비용이 급증했음에도 NHS가 그 틀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국민의 절대적 지지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NHS를 어떻게 운영하고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총리 선거 때마다 중요한 정책 변수 중 하나로 작용했다. 권력의 향배를 정하는 핵심 잣대 중 하나로 작용했다는 말이다. 후보자의 비리 여부를 놓고 공방을 벌이는 한국의 대통령 선거와 달리, 영국에서는 그야말로 정책 대결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이 지지하더라도 영국 정부에 이를 수행할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NHS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영국 정부가 공공성에 기반을 둔 의료 시스템을 고집한 밑바닥에는 '국가가 국민의 복지를 위해 힘써야 한다'는 복지국가의 역사적 전통이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NHS에 문제가 전혀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여전히 긴 대기 시간과 국민의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하는 의료 수준 등 여러 과제가 늘 존재한다(자세한 내용은 2편에서 다룬다).
그렇지만 국가가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이든 상관없이 모든 국민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고, 이것이 이들의 삶을 지키는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는 점은 귀감으로 삼을 만하다. 특히 공공 의료 시스템이 일천할 뿐더러, 의사와 병원의 이익을 위한 행위별 수가제로 인해 과잉 진료와 과잉 처방을 일삼는 한국 현실을 생각하면 NHS는 부러울 따름이다.
NHS가 제공하는 서비스와 비용의 범위 |
NHS의 원칙은 환자의 질병이 중증이든 경증이든 모든 질환을 무료로 치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충치, 틀니 등 치과 치료 및 시력이 나빠서 안경을 써야 하는 경우 개인이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물론 16세 미만 청소년과 65세 이상 노인의 경우에는 약자 보호 차원에서 비용의 일부 혹은 전액을 국가에서 지불한다.
모든 치과가 NHS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민간(Private) 병원'인 것은 아니다. NHS 소속 치과 병원도 있는데, 지역마다 약간 다르지만 이곳에선 실제로 서비스를 받기 위해 3~6개월 기다리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응급으로 치료하는 NHS 치과 병원도 지역마다 있지만, 이 병원은 정말 증상이 심하고 급박한 사람만 이용할 수 있다.
민간 치과 병원의 경우 비교적 빠르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반면, 비용이 매우 비싸다. 증상에 따라 다르지만 동일 서비스에 대해 NHS 치과에서 내는 비용이 수만 원이라면, 민간 치과에서는 수십만 원 이상 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경증이든 중증이든 무상으로 치료한다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을 때도 있다. 일반적인 암의 경우 비용이 지급되지만, 현실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난치병이나 희귀병에 걸린 환자의 경우 장기간 진료하면 그 비용이 천문학적인 수준에 이르기 때문에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국가의 비용 지원이 중단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는 언론으로부터 NHS가 질타를 받고, NHS의 지원 범위를 놓고 논란이 일기도 한다.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던 정신 지체 장애인 소년을 상담치료사, 복지사 등이 거의 모든 일과시간 동안 밀착 치료한 결과 상태가 좋아졌지만,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앞으로는 중단하겠다는 보도가 나온 적도 있다. 이 경우 개인이 사재를 들여 치료를 받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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