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하일기-2008년3월18일] 그 곳에 가면 그가 있다

2008. 3. 18. 15:10사람 사는 세상

봉하탐방기-그 곳에 가면 그가 있다
양정철(전 홍보기획비서관 )
밖이 또 시끌시끌합니다. 여러 사람의 고함이 뒤엉켜 있습니다. 조금 더 있어보니 그들이 목소리를 모은 모양입니다. 이번엔 한 목소리로 외치는 게 확연히 들립니다. “대통령님 나와 주세요!” 몇 초 간격으로 반복됩니다.
고요한 집 안을 거듭 때리는 수 백 명의 함성에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부인 권양숙 여사와 마주 앉아 막걸리에 파전을 곁들여 담소를 나누려던 토요일 오후의 한가로움은 그렇게 깨집니다.

대통령은 좀 지쳐 보입니다. 오늘만 몇 번째 되풀이되는 일인지 모릅니다. 너 댓 명의 비서들과 함께 현관문을 나서자 수 백 명이 환호를 합니다. 어림잡아 봐도 3백 명은 돼 보입니다.
지친 기색도 없이 대통령이 갑자기 뜁니다. 비서들도 따라 뜁니다. 청와대 5년 동안 대통령이 뛴다고 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라 당황스럽습니다. 대통령이 한 걸음에 그들 곁으로 다가서자 인파가 환호를 합니다. 손을 흔들며 반가운 웃음을 짓자 환호는 절정에 달합니다.

잠잠해지기를 기다린 대통령이 인사합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그들도 제 각각 소리를 높여 인사합니다. 또 IT선진국 국민들답게 반 이상은 핸드폰으로 대통령을 찍기 바쁩니다. 그들을 위해 포즈를 취해줍니다. 인파에 둘러싸여 있으니 각도까지 바꿔가며 ‘팬 서비스’를 합니다. 충분히 포즈를 취해 준 대통령은 본격적인 인사를 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감사하지만 한편으론 참 미안합니다. 멀리서들 오셨는데 제가 식사도 대접 못해 드리고 차도 한 잔 못 드립니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죠?” 인사치레가 아니고 대통령의 표정엔 진심어린 마음이 가득 배어 있습니다.
아, 그랬던 거군요. 대통령은 미안한 겁니다. 하루 몇 차례씩 ‘불려 나오고’, 나와서 인사하고, 같이 대화하고, 포즈 취해주고 하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 다 미안해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점잖지 못하게 뛴 것도 그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몸을 급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가요, 저 말고도 볼 데가 많습니다.” 관광 안내 같은 기반시설이 아직 부족하다 보니 별 볼거리 없이 돌아가 혹시 실망하지는 않을까 걱정인 모양입니다. 괜시리 미안한 마음에 대통령은 짧은 주변 가이드까지 합니다.
대통령과 좀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대통령 목소리가 잘 안 들린다며 큰 소리로 “마이크를 써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저의 목소리와 여러분 목소리로 주거니 받거니 대화하고 싶어 마이크 안 쓸랍니다”라며 사양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많을수록 좀 큰 소리로 말해야 합니다. 목이 아플 만도 합니다.


대통령 인사말이 끝나면 질문이 쏟아집니다. “지내시기 괜찮으시냐” “건강하시냐” “뭘로 소일하시느냐” “식사는 어떠시냐” 등등 대통령 생활 주변에 관한 걸 많이 묻습니다. 대통령은 일일이 근황을 설명하며 답합니다. 그리고 마무리 인사를 합니다. 박수가 쏟아집니다.
뒤돌아 들어가는 대통령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들의 환호는 계속됩니다. 대통령도 몇 번씩 돌아서서 손을 흔들고 목례를 하며 고마움을 표시합니다.
물론 이게 끝은 아닙니다. 대통령을 만나 뜻을 이룬 한 무더기의 방문객들이 빠져 나가면 그 뒤로 몰려든 방문객들이 또 다시 한 무더기가 돼 대통령을 불러내면 같은 모습이 되풀이됩니다.

대통령이 고향으로 내려간 지 3주. 김해 진영에서 매일 벌어지는 특이한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진풍경.
대통령이 살고 있는 고향 마을은 그야말로 촌구석입니다. 그곳 시골까지 그것도 퇴임한 대통령을 찾아 연일 수 천 명의 방문객이 몰리는 것은 분명 진풍경입니다.
현지 경찰 추산으로는 3월 16일까지 다녀간 방문객(25일 귀향행사 방문객 제외)이 7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하루 평균 3500명이 다녀간 셈입니다. 줄어들지도 않습니다. 3월 16일의 경우 하루에만 1만 명이 다녀갔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방문객들의 연령과 지역이 아주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20대 연인에서부터 70대 어르신들까지 고루 분포돼 있습니다. 또 말 그대로 경향각지에서 옵니다. 인근 지역은 물론 경북, 호남, 충청, 강원, 수도권 등을 가리지 않습니다.

비서들은 물론 대통령도 예상치 못한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당초 계획과 달리 차질을 빚는 일도 많습니다. 먼저 대통령 내외는 고향에서 조용하고 차분하게 보내려던 생활이 쉽지 않게 됐습니다. 분주합니다. 짐도 다 풀지 못했습니다.
비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초 서너 명이 현지에 상주하며 일을 도와드리는 것으로 계획했지만, 인파가 몰리면서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게 돼 버렸습니다. 대 여섯 명의 자원봉사자가 객지생활하며 온갖 잡무를 지원하고 있지만 그래도 일손이 딸립니다.
그러다 보니 몇 주 전까지 민정수석을 지내던 분이 대통령과 사진 찍으려는 분들 줄 세워 안내하고, 부속실장을 지내던 분이 ‘전공’과 관계없이 사진사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경호관들조차 경호하랴, 줄 세우랴, 안내하랴, 홈페이지에서 사진 다운로드 받는 방법 안내하랴, 함께 청소하랴 정신이 없습니다.
모두들 힘들지만 행복한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힘나게 하는 것은 방문객들의 반응입니다.

그 곳에 이르려면 차로 짧게는 한 두 시간, 길게는 대여섯 시간을 달려야 합니다. 주말이면 차량이 몰려 마을 입구까지 들어서는 데만도 30분 넘게 거북이 운행을 해야 합니다. 마을을 쭉 들러보고 대통령 집 앞에서 그를 만나기 위해선 또 몇 십 분을 기다립니다. 대통령이 근처에 산책 가거나 등산 나가 있으면 돌아올 때까지 몇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렇게 해서 만난 대통령. 그들은 진심어린 격려와 다양한 성원의 말을 건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향에 잘 내려오셨습니다.” “그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큰 일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 “직접 보니 너무 좋습니다.”….
물론 대통령이 답하기 민망한 인사도 있습니다. “다시 나오십시오.” “저희 동네 한번 오십시오.” “따로 한 번 만나 주십시오.” 이럴 때 대통령은 그저 웃기만 합니다.
고향 특산물을 들고 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얼마 전엔 제주 근해에서 참치를 잡았다는 분이 직접 냉장 보관한 그 놈을 차로 싣고 와 선물을 하는 바람에 모두들 나눠 먹으며 봄 꽃 보다 밝은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해프닝도 많습니다. 1만 명이 몰린 16일, 밀려드는 방문객들을 감당하기 어려워 대통령은 들판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집 앞에서 기다리던 인파 가운데 2,3백 명이 우 따라나섰습니다. 미안한 대통령은 중간 산책로에서 가족별로 일일이 사진촬영에 응해줬습니다.
한 시간 가까이 둑방길, 논길을 따라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방향을 돌리는데 중간 논두렁에 5,6백 명의 방문객들이 대통령을 기다리며 진을 치고 있습니다. 뙤약볕 아래 한 시간 가까이를 기다린 사람들입니다. 결국 줄을 세워 논길 한 가운데에서 사진촬영이 시작됐습니다. 희한한 기념사진입니다. 얼마 전까지 대통령을 지낸 분과 평범한 시민들의 논길 기념사진.

하지만 찍어도, 찍어도 끝이 없습니다. 인파가 계속 새로 몰려들어 이러다 날 샐 판입니다.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지만 대통령을 놔 주지 않습니다. 그날 대통령은 결국 경호관들이 준비하고 있던 자전거를 타고 논길을 따라 도망가야만 했습니다.
인파가 몰리다보니 불미스런 일도 있습니다. 소매치기가 등장하는가 하면, 외지 잡상인들이 몰려 주민들의 불만을 사는 일도 있습니다. 봉하 오시는 분들, 소매치기 조심하십시오.

어쨌든 따뜻한 마음으로 대통령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인파가 몰려드는 데 힘든 내색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집 안에서 피곤해 보였던 대통령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그들에게 웃는 모습을 잃지 않습니다.

기다려 준 이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 위해 스스럼없이 농담도 건넵니다. 왜 권 여사와 함께 나오지 않았냐는 질문엔 “설거지 하나 봐요” 혹은 “여자들은 화장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그러면 여러분 더 기다려야 되잖아요.” 같은 뜻밖의 대답을 하면 와 웃음이 터집니다. 어린아이를 안아달라고 하는데 정작 아이가 수줍어 얼굴을 돌리면 “야, 네가 노무현을 몰라보는구나.” 그래서 또 웃음이 터집니다. 적극적인 아이들에겐 “야, 너 대통령감이다. 배짱이 두둑하구나”라며 덕담을 아끼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존경하는 대통령을 보여주겠다며 아이를 데리고 오는 이들이 많아, 대통령은 아이들을 각별히 챙깁니다.

3주 만에 만난 대통령은 얼굴이 많이 탔습니다. 이유인즉슨 하루 한 두 시간 가까이 수 백 명의 방문객들과 일일이 사진을 찍는데, 세심한 대통령이 역광(逆光) 나오면 안 된다고 해를 정면으로 안아 포즈를 취하며 오래 서 있다 보니 그리 탔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보러 온 사람들은 여러 가지가 신기한 모양입니다. 얼마 전까지 대통령을 지냈던 분을 직접 보니 신기하고, 일부 언론이 “아방궁”이니 “호화 저택”이니 공격해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어서 신기하고, 대통령이 직접 건네는 편한 농담과 인사가 신기한 모양입니다.
최근 인터넷에서 ‘노간지’로 유명해진 사진이 있지만 대통령의 패션과 행동은 영락없는 ‘동네 아저씨’ 혹은 ‘이웃집 할아버지’입니다. 다소 낡은 스타일의 새마을 모자 비슷한 모자에 수수한 점퍼 차림은 우리가 동네 어귀에서, 혹은 집 근처 목욕탕 앞에서 만나는 친근한 어른과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봉하마을 진풍경은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일입니다. 우리 뿐 아니라 세계 다른 나라에서도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그 시골마을에 하루 수천 명이 몰리는 배경을 정확하게 설명해 줄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너무 다른 호기심, 너무 다른 이유, 너무 다른 지역, 너무 다른 나이의 여러 사람들이 대통령을 찾는 배경을 몇 가지 단어로 정리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다만 재임 중 대통령과 국민을 가리고 있던 많은 베일, 많은 장막, 많은 이미지 조작이 모두 걷히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그를 직접 한 번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리는 것에 어떤 해설을 붙이는 것은 부질 없어 보입니다. 방문객 중 한 분에게 왜 찾아 왔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답합니다. “노 대통령이 있으니까 왔지”
그렇습니다. 그 곳에 가면 그가 있기 때문입니다. 국민들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던 대통령의 소망은 이미 이뤄진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