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우리는 Nobody가 아니다-명덕

2006. 12. 5. 21:21정치


우리는 Nobody가 아니다.

** 왜 사는가.

 

왜 사는가? <행복>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이보다 더 나은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여기부터 삶의 방식에 따라 견해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왜 사냐고 묻거든, 그냥 웃지요.’ 상당한 묘미가 담겨 있는 삶에 대한 명제다. 어차피 인생이란 알다가도 모를 알쏭달쏭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이 세상일에 대해 무사태평하게 바라보며 살아갈 수는 없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불행하다>는 것을 함축한다. 행복에 대한 마땅한 기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행하다는 것의 객관적 기준 역시 없는 것 같다. <내가 불행하다>라고 느끼는 것도 주관적이어서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것 같다.

 

가만 따져보면 불행은 타인에 대한 질시, 세상적 행복에 대한 상대적 결여감, 타인의 삶에 대한 지나친 간섭으로부터 생겨나는 것 같다. 옆집이 잘산다고 내가 불행해질 이유는 없다. 이웃이 정치적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 살다 누군가가 갑자기 특출나게 잘 살게 되었다고 해서 불행해질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주위에서 이런 경우들을 볼 때, 우리는 상대적으로 불행하다는 감정에 빠지고, 곧잘 종국에 가선 자신의 무능을 탓하고 자학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자신의 불행함에 대한 탓을 전적으로 이웃에게 돌리고, 마침내는 공동체 전체에 대한 적개심까지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이쯤에서부터 우리의 진정한 불행이 시작된다. 이런 불행에 빠지지 않는 길은 남의 삶에 <간섭>하지 않고, <무관심>하게 이웃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타인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면서 제멋에 사는 것도 삶의 한 방편일 수 있겠다.

 

정작 문제는 그런데 있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도리 없이 행복을 추구하고, 그 물질적인(외적인) 혹은 정신적인(내적인)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선)을 목표로 한다>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인간의 어떠한 행위적 삶의 목적은 보다 좋은 것, 최선의 것을 궁극적 목표로 한다. 이 최선의 좋음이 곧 <행복>이다. 이것이 없다면 인간의 행위와 선택이 좋은 것을 목표로 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라고 규정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정치학> 첫머리에서 “모든 폴리스(국가)는 어떤 종류의 공동체이고, 모든 공동체는 어떤 좋음을 목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개인이 어떤 좋음을 위해 살아나가듯이 모든 공동체 역시 우리가 좋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각각의 좋음들보다 더 좋은 모든 좋음을 포섭하는 최고의 좋음을 국가는 추구한다. 개인의 행복도 국가의 행복에 포섭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국가의 안녕과 행복이 없이는 개인의 행복도 있을 수 없다는 전체주의적 정치관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시한 셈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상당한 비판이 뒤따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보다 더 잘 살기 위해서 공동체를 조직하고, 그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삶의 목표를 실현해 보고 싶다는 것을 간파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은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인간은 더 잘 살기 위해서 도시로 모여든다’는 명제는 오늘날도 여전히 타당하다.

 

** 거인족 퀴클롭스와 Nobody

 

10년 간의 긴 전쟁이 끝나고 고향을 찾아가는 호머의 오딧세우스에게는 고난의 대장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향 이타카에는 사랑하는 아내 페넬로페와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다. 고향을 찾는 간지(奸智)가 뛰어난 오딧세우스의 모험에는 자신을 유혹하는 여러 여자 신들에 관한 얘기가 있다. 칼륍소가 남편으로 삼기를 열망했고, 교활한 키르케도 남편으로 삼기를 바랬다. 그렇지만 자기 고향과 부모보다 더 달콤한 것이 그에게는 없었다.

 

이곳저곳으로 항해하던 중 오만불손하고 무법한 거인족 퀴클로페스 족이 사는 곳에 우연히 배가 닿게 된다. 이들은 동굴 안에 살면서 각자의 자식들과 마누라들에게 법을 정해주고 자기들끼리는 상관하지 않고 살던 족속이었다.

 

신을 공경하고 손님을 친절하게 모시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마땅한 도리였으나, 그 거인 족속은 신을 명령도 듣지 않고 자신의 명령대로, 간절히 도움을 청하는 오딧세우스의 전우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몸뚱이를 토막내서 내장이며, 고기, 골수가 들어 있는 뼈까지 남김없이 다 먹어치운다.

 

오딧세우스는 동료의 복수를 하기 위해 올리브 나무를 불에 달구어 그의 눈에 집어넣고 돌릴 심사로 꾀를 짜낸다. 인육을 먹은 퀴클롭스에게 포도주를 먹게 해서 취하게 만든다. 그런 다음 이름을 묻는 그에게 ‘퀴클롭스여.... 내 이름은 Nobody(outis)요. 사람들이 날 우티스라고 부르지요.’ 이윽고 술에 취해 나자빠진 퀴클롭스의 눈에 빨갛게 단 말뚝을 집어넣어 휘저었다.  피투성이가 된 그는 눈 안에 깊이 박힌 말뚝을 뽑아내고 고통에 차 외마디를 내지르면서 주위 동굴에 사는 그의 다른 동료들을 불렀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다.

 

그의 동료들은 ‘누가 계략이나 힘으로 그대 자신을 죽이는가’라고 묻는다. 그러자 폴리페모스가 ‘친구들이여, 힘이 아니라 계략으로 나를 죽이려는 것은 우티스(Nobody)요.’라고 말한다.

그의 동료들은 ‘그를 폭행하는 것이 아무도 아니라(me tis) 혼자 있다면’ 신이 보낸 병일테니 포세이돈 왕께 기도나 하라고 그냥 돌아가 버린다. 이렇게 오딧세우스는 이름(Nobody)과 계략으로 그들을 보란듯이 속였다. 그 동굴을 무사히 빠져나가, 항해를 계속하며 오딧세우스는 뱃전에서 놀려대듯이 자신의 본래 이름을 그에게 알려준다.

 

** 우리는 로빈슨크루소가 아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호머의 오딧세이아의 퀴클로페스족 마냥 고립되어 살아갈 수는 없다. 공동체를 이루지 않고 고립되어 살아간다면, 꾀 많은 오딧세이아 같은 한 사람의 기지에도 쉽게 해를 당할 수 있다. 그만큼 인간은 허약하다. 홀로 자급자족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척 힘든 노릇이다. 그래서 인간은 함께 모여 가족을 이루고, 사회를 만들고, 국가를 구성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선(善; 좋음)은 개인의 쾌락과 만족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웃해 살아가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선이 실현될 수 있을 때,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인 듯이 다가와야 한다. 자신의 법과 잣대로만으로는 공동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두가 합의하고, 개인이 가진 이기심과 욕심을 줄이고, 남과 더불어 조화하면서 살아가려는 공동의 노력 없이는 진정한 행복의 길에 도달할 수 없다.

 

또 다시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의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져서, 정치적 동반관계를 형성하는 숱한 논의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는 시절이 도래하고 있는 듯하다. 정치적 이합집산의 얘기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돌아다닌다. 어차피 정치라는 게 정권을 목표로 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도 다른 정파간의 조화와 타협을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궁극적 목표인 시민의 행복을 안전에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눈앞의 이익만을 염두에 둔 정치적 행태에 머물러 자신만의 이익만을 구한다면, 그런 정파는 오래가지 못하고 단명했다는 것을 우리는 늘 보아왔고 충분히 경험한 바 있다. 정치인에게 살신성인하는 자세를 요구한다는 것이 지나친 사치일지 모르겠지만, 좀 더 넓은 시야에서 긴 안목으로 바라보아 올바른 정치가 될 수 있도록 개인적 이득과 욕망을 버렸으면 한다. 

 

병술년 한해도 거의 저물어 간다. 곧 세밑이 다가 올 것이다. 정치의 사각지대에 갇혀 소외되어 사는 이웃도 없고, 물질적 어려움에 처한 이웃도 없기를 소망한다. 따뜻한 겨울이 모든 이웃의 가슴 속에 훈훈하게 피어나길 진정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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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MoveOn21.com
글쓴이 : 가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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