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2006. 7. 3. 21:38관심사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가능하다면 꽃밭이 있고
가까운 거리에 숲이 있으면 좋겠어
개울물 소리 졸졸거리면 더 좋을 거야

 


잠없는 나

당신 간지럽혀 깨워
아직 안개걷히지 않은 아침 길
풀섶에 달린 이슬 담을 병 들고 산책해야지

 


삐걱거리는 허리 주욱 펴 보이며
내가 당신 “하나 두울~”
체조 시킬거야

 

 

햇살이 조금 퍼지기 시작하겠지
우리의 가는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반짝일 때
나는 당신의 이마에 오래 입맞춤하고 싶어
사람들이 봐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

 


아주 부드러운 죽으로
우리의 아침 식사를 준비할거야

 

 

이를테면 쇠고기 꼭꼭 다져넣고
파릇한 야채 띄워 야채죽으로 하지
깔깔한 입안이
솜사탕 문 듯 할 거야
이때
나직히 모짜르트를 울려 놓아야지

 


아주 연한 헤이즐럿을 내리고
꽃무늬 박힌 찻잔 두 개에 가득 담아
이제 잉크 냄새 나는 신문을 볼 거야
코에 걸린 안경 너머 당신의 눈빛을 읽겠지

 


눈을 감고 다가가야지
서툴지 않게 당신 코와 맞닿을 수 있어
강아지처럼 부벼 볼 거야
그래 보고 싶었거든

 


해가 높이 오르고
창 깊숙이 들던 햇빛 물러 설 즈음
당신의 무릎을 베고
오래오래 낮잠도 자야지
아이처럼 자장가도 부탁해 볼까

 


어쩌면 그 때는
창 밖의 많은 것들, 세상의 분주한 것들
우리를 닮아 아주 조용하고
아주 평화로울 거야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당신의 굽은 등에 기대 울고 싶어


 

장작불같던 가슴
그 불씨 사그러들게 하느라 참 힘들었노라
이별이 무서워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노라


 

사랑하기 너무 벅찬 그 때
나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말할거야


겨울엔
당신의 마른 가슴 덥힐 스웨터를 뜰 거야
백화점에 가서 잿빛 모자 두 개 사서 하나씩 쓰고
강변 찻집으로 나가 볼 거야
눈이 내릴까...


 

봄엔
당신 연베이지빛 점퍼 입고
나 목에 겨자빛 실크 스카프 메고
이른 아침 조조 영화를 보러갈까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같은...



머리 곱게 빗고
헤이즐럿 보온병에 담아 들고
낙엽 밟으러 가야지

 

 

가을엔 희끗한 
저 벤치에 앉아
사진 한 번 찍을까
곱게 판넬하여 창가에 걸어두어야지

 

 

그리고 그리고
서점엘 가는 거야
책을 한아름 사서 들고
서재로 가는 거야

 

 

그렇게 아름답게 늙어가고 싶어
나 늙으면 그렇게 그렇게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양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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