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전쟁
올 6월은 월드컵의 달이 되었다. 온 나라가 '대~한 민 국'의
함성과 붉은 물결로 뒤덮였다. 하지만 56년 전 1950년 6월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달이다.
한국전쟁은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우리 겨레는 잊을 수 없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전쟁이기도 하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계속된 이 전쟁은 이미 끝난 전쟁이 아니고, 아직도 휴전 상태로 남아 있다. 3년 남짓 계속된 한국전쟁 중 남측의
국군 및 유엔군 사상자는 약 200만여 명이요, 북측의 인민군 및 중공군 사상자는 300만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전쟁으로
10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생가지 찢기듯 이산가족으로 50여 년을 눈물과 한숨으로 살다가 눈을 감았고, 아직도 남북한 곳곳에는 숱한
이산가족들이 전쟁의 상흔을 삭이며 살아가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56돌을 앞두고, 어린시절 한국전쟁을 본 사람으로 그때의 이야기를
곁들여 몇 장의 사진을 감상해 보고자 한다.
한국전쟁이 일어날 당시, 나는 여섯 살 난 소년이었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길고도
무더웠다.
하늘에서는 전투기의 굉음과 폭격소리로, 산과 들에서는 멀리서 가까이서 들려오는 대포소리와 기관총소리로 귀청이 멍멍했다.
논이나 밭, 들길에는 뽕나무 채반에 누에처럼 널브러진 시체들, 전투기들의 융단폭격으로 온전한 건물 하나 없이 온통 폭삭 주저앉은
도시와 마을…, 이런 장면들이 또렷하게 또는 희미하게 여태 기억 속에 남아있다.
2004년 2월 2일, 나는 여러 네티즌의
성원으로 백범 김구 선생 암살 배후 단서가 될 문서를 찾고자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 갔다.
영어에 서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던
중 5층 사진자료실에서 'Korea War' 파일을 들추다가 무릎을 쳤다. '바로 이것이다' 하고서.
여기에는 한국전쟁의 실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산길 들길 아무데나 지천으로 흩어져 있던 시체더미들, 쌕쌕이(전투기)들이 염소 똥처럼 마구 쏟아 떨어뜨리는 포탄, 포화에
쫓겨 가재도구를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허겁지겁 뛰어가는 피난민 행렬, 배만 불룩한 아이가 길바닥에 버려진 채 울고 있는 장면, 흥남부두에서
후퇴 수송선에 오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 유엔군들이 얼마나 다급했으면 군복을 입은 채 그대로 바다로 뛰어 들어가서 수송선에 오르는
모습, 끊어진 대동강 철교 위로 꾸역꾸역 곡예 하듯 남하하는 피난민 모습, 꽁꽁 언 한강을 괴나리봇짐을 이고 진 피난민들이 어린아이를 앞세우고
건너는 모습, 부산 영주동 일대의 판자촌, 수원 역에서 남행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피난민들….
순간 나는 이 사진들을 가져다가
우리나라 사람, 특히 한국전쟁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다행히 자료실에서 스캔은 허용된다고 하여, 재미 동포의
도움을 받으며 40여 일간 수만 매의 사진자료를 들춰 그 가운데 480여 매를 엄선하여 복사했다.
그날 저녁부터
<오마이뉴스>에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쟁'이라는 제목으로 30회 연재했다. 연재 후 곧장 사진전문 눈빛출판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이미지>라는 제목으로 사진집을 펴냈다.
이 사진집이 나오자 독자들의 성원이 컸다. 나는 분외의 성원에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
미처 들춰보지 못한 사진들이 눈에 어른거려 다시 지난 2005년 11월 27일에 워싱턴 행 비행기에 올랐다.
1차 방미 때 곁에서
도와주신 박유종 선생(임시정부 박은식 대통령 손자)이 다시 소매를 걷어부쳐 주셨다. 12월 10일까지 2주 동안 매일 아침 가장 먼저
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 출근해서 마지막 퇴근자로, 자료실을 샅샅이 뒤져 700여 매의 한국전쟁 사진을 입수해 왔다.
그 가운데 발굴
현장에서 나를 울렸던 사진 몇 점을 6·25 56돌 기념으로 공개한다.
나를 울렸던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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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ra |
| 이 사진은 1950년 9월 경남 김해에서 병중의 아내를 지게에 지고
피난을 가는 한 지아비의 모습을 담았다. 부인은 시각장애인인 듯 하다. 나는 이 사진을 찾고는 부부애의 극치로 마치 성화(聖畵)를 대한 듯,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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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ra |
| 이 사진은 그 무렵 드문 컬러사진으로 1951년 3월 1일, 전주 교외의
피난행렬이다.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갔는지 노부부가 손자를 앞세우고 피난길을 떠나고 있다.
할아버지의 지게 위에는 쌀가마니와 이불이
지워졌고, 할머니의 등짐에는 밥그릇, 숟가락, 바가지 등 가재도구가 담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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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ra |
| 1951년 8월 20일, 서울 영등포 역 플랫폼에서 한 아낙네가 두
아이에게 참외를 깎아주고 있다. 언저리에는 고달픈 피난봇짐이 너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