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1. 21:38ㆍ시민엉아
유시민 “지금 너무 불행하고 고민스럽다”
경향신문 입력 2012.09.01 12:55 수정 2012.09.01 15:53
그러던 그에게 갑자기 찬사와 호의가 쏟아진다. 보수논객인 김순덕씨조차 칼럼에서 "유시민이 지금 거의 영웅이 됐다. 진보정치를 혁신할 정치인은 유시민밖에 없다며 일각에선 감동의 도가니다"라고 했다. 그가 통진당 폭력사건 때 온몸으로 심상정 의원을 막아내는 모습, 구당권파와 신당권파를 아우르려고 하는 태도를 보고 '유시민의 재발견' 등의 제목으로 그를 칭송하는 기사가 가득하다.
구당권파 측인 백승우씨가 아메리카노 커피 논쟁을 촉발했을 때도 그는 전처럼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당원 게시판에 "부르주아적 취향이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한 번 뿐인 인생인데 이런 소소한 즐거움조차 누릴 수 없다면 좀 슬프지 않겠나"란 글을 올렸다.
촌철살인의 날카로운 언어들, 냉소적인 태도가 '브랜드'인 그가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그는 진짜 진보정치를 혁신할 영웅일까.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호실장을 자임하며 한때는 유력한 친노세력의 대통령후보이기도 했던 그는 현재의 대선정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늦여름 비가 내리는 파주 헤이리 출판단지의 사무실에서 아메리카노 커피를 마시면서 "걱정이다, 걱정이다"를 연발하는 그를 만났다.
남들보다 빨리 쉽게 부글부글 끓는다고 '비등점이 낮은 사람'이란 평을 듣기도 했다. 요즘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흥분을 잘 하지 않는다. 비등점이 높아진 것은 나이의 힘인가.
"하도 많이 끓어 물이 이미 기체가 된 것 같다.(웃음) 나이의 힘으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진짜 힘도 떨어지고 기도 죽었다. 그게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언제나 청년처럼 살수는 없지 않은가."
아메리카노 논쟁이 거셌다. 대부분의 신문에서 사설과 칼럼으로 다룰 정도였다.
"그런 에피소드는 언론에서 좋아할 소재이니까 널리 퍼졌을 게다. 커피가 하루에 22억잔이나 팔릴 만큼 커피 애호가들이 많아서 관심이 높았겠지…. 뭐 그저 우리 당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에피소드의 하나일 뿐이다. 부끄럽다."
무엇이 그리 부끄러운가.
"지난 총선 때 좋은 당을 만들어 어려운 국민을 위해 좋은 정치 하겠다고 약속하고 표를 달라고 했다. 그런데 좋은 정치는커녕 국민에게 근심을 주는 당이 되어서 면목없다. 전통적 진보세력과 진보자유주의자들이 손을 잡고 대중적 진보정당으로 나섰다. 국민들이 쉽게 이해하고 사랑받는 정당을 만들고 싶었는데…. 내 앞가림도 못하면서 이런 인터뷰를 통해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 것도 부끄럽다. 당을 고쳐서 원래 약속대로 만들 전망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럴 전망이 안 보인다. 결국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다. 심각한 문제다. 어떻게 하는 게 책임지는 것일까, 책임지는 법을 고민하는데 잘 모르겠다. 요즘 너무 압박을 받는다."
현재 통진당 상황은 어떤가.
"지금 통진당은 누구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할 수 없는 구조다. 식물정당이다. 이 상태로 가는 것보다는 갈라지는 것이 낫다. 단결해서 있어봤자 아무것도 될 일이 없다. 감추는 것보다 허물은 드러내는 것이 낫다. 당은 이미 파괴가 됐다. 나는 파괴된 당이 파괴되었다고 말할 뿐이지 파괴를 선동하는 것은 아니다."
구당권파와 사이에 가장 큰 갈등요인은 뭔가.
"다들 아는데 굳이 내 입으로 말하기 싫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중앙위 토론회에서 구당권파들이 '길들여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투쟁을 위해서 정치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은 정당이 다른 가치관, 문화양식을 조율하며 옳은 절차를 맞추는 과정을 '길들여진다'고 보면 답이 없다. 독재나 기업의 횡포에는 당연히 투쟁해야겠지만 국민에게 맞추는 것은 얼마든지 해야 한다. 만사의 이치가 다 그렇다. 널리 퍼지게 하려면 주변환경에 적응하고 조화를 이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키면서, 유연하게…. 내가 탈당할지, 당원들이 분당할지 아직 결정을 못내렸다.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국민을 속인 셈이라 요즘 바깥 출입조차 조심스럽다."
그래도 유 대표에게는 언론과 대중들이 몹시 호의적으로 변했다. 보수언론에서도 유시민의 재발견이라며 칭찬한다.
"그거야 최근 5년간 내가 한 일이 잘된 일이 없고 매번 실패하니 불쌍하게 보여 그럴게다. 대구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지사 선거에 이르기까지 다 떨어졌다. 맥빠지고 힘없는 내게 비난할 의지도 없는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도 수많은 선거에서 떨어졌지만 대통령에 당선됐다.
"물론 한 고조도 그렇고 링컨도 숱한 패배를 겪고 낙선했다. 하지만 수 차례 실패 끝에 영광을 얻은 인물은 아주 극소수다. 사람들은 극소수의 사례를 꼭 자신에게 적용될 것으로 믿는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생각이다. 뭔가 정치적 성과를 내야 더 중요한 역할이 주어지고 더 큰 일을 성사시키는데, 5년간 하는 일마다 안 된 사람을 국민들이 높이 평가하겠나."
이번 대통령 후보들의 정책이나 공약을 보면 어떤가.
"겁이 난다. 박근혜건 문재인이건 안철수건 간에 '다들 진짜 대통령이 되면 어떡하려고 그러지'란 걱정이 앞선다. 다들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국민 눈높이에 맞춘 정책을 앞세우며 공약을 남발하는 것 같다. 찬물을 끼얹기는 싫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국제상황이나 국내 여건에서 긍정적 지표가 안 보인다. 다음 정부는 MB 정부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하는데 파이를 키워 나눠주는 정책을 해선 안 된다. 그건 불가능하다. 다음 5년은 그런 역할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잘 분담시킬 수 있는 사람, 더 큰 행복과 더 많은 부를 고루 나눠주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나 감내할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국민은 정부가 열심히 파이를 키워 많이 나눠주길 기대하지만 현 상황에선 불가능하다. 시대상황과 국민 소망이 불일치하니 갈등과 불만이 증폭될 게다. 남북관계가 유일한 출구다. 남북경협이 되면 그나마 일시적 방편이어도 숨통이 트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박근혜 후보는 최악이다. 그 주변의 인물들인 극우 반공주의자, 흡수통일 주장자들이 북한과 대화하기가 어렵다. 또 그 어떤 비법을 써도 청년실업은 근본해결이 어렵다. 인구 구성상의 배치가 최악의 조건이다. 일본의 단카이시대, 미국의 베이비부머시대 등 현재의 50대 후반들이 자동적으로 은퇴하는 2017년쯤에야 청년실업이 해결된다. 산업구조의 진화속도가 그렇다. 사실상의 가족규모가 작아져 1인가구가 늘면서 대형평수 아파트나 주상복합 아파트의 전성기는 막이 내렸다. 누적적 하락, 만성적 불경기가 지속되어 부동산 시장이 가라앉는다. 담보대출, 부실채권은 폭탄수준이다. 공기업 채무도 엄청날 것이다. 무엇보다 현 정부에서 4대강이며 곳곳에 돈을 써버려 다음 대통령이 여유롭게 쓸 재정 여유분이 없는데 어쩜 저런 정책을 말하는지…."
그럼 차기 대통령의 가장 큰 자질과 덕목은 무엇인가.
"정직이다. 현재 우리니라 산업구조의 변화, 재정·금융시스템, 대외무역 환경의 변화를 다 포괄해 국민의 삶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솔직히 설명하고 어떤 인내심을 요구하는지를 알려줘야 한다. 진실에 의거해서 정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지금은 어렵지만 이 고비만 넘기면 희망이 보이니 조금만 더 인내하자. 나도 투명한 정치를 하겠다'고 할 정직과 용기가 필수 덕목이다."
리더보다 팔로어의 자세도 중요하다. 항상 책에서도 시민의식, 국민의 태도를 강조하지 않았나
"아직은 내가 정치를 하는 입장이라 국민은 왕이라고 생각한다. 왕에게 무슨 훈계를 할 수 있나. 정치인은 이처럼 자기 검열이 많다. 왕에게는 무조건 충성해야 한다."
너무 원론적 질문이지만,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란 폭력의 선용이다. 국가 권력, 즉 폭력을 좋은 의미로 쓰는 것이다. 쌍용자동차 사건, 성폭력 범죄 등등 곳곳에서 부당하고 어이없는 횡포가 일어날 때 국가의 강제력을 제대로 쓰는 것이 정치다. 국민들에게 돈을 뺏어오는 권력인 조세권, 멀쩡한 남의 집 아들을 군대로 끌어오는 징집권, 범인을 강제로 잡아들이는 치안권 등 강제력의 행사를 공정하개 선한 목적으로 쓰는 것이 정치다. 정치는 프랑켄슈타인을 다루는 일이고 지킬박사와 하이드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치는 결과로 말한다. 아무리 선의로 했다 해도 결과로 책임을 못지는 제도정치는 하지 말아야 한다. 무서운 일이다."
정치인으로서 행복했나.
"과거 행복한 때도 있었지만 현재는 불행하고 너무 고민스럽다. 국민에게 거짓말을 해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행복하다. 회의에 참석할 때 외에는 집과 출판사의 사무실을 오가며 책을 쓰고 가족과 외식도 하고 아이가 아프면 같이 병원에도 가는 일상의 평화를 누린다. 2008년 국회의원 선거에 떨어지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전까지 비슷한 시기를 보냈다. 그때는 지금보다 젊고 적어도 정치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지금은 당이 저 지경이 되었는데 어떻게 재정비하나. 그게 가능한가. 아니면 정치를 어디에서 누구와 하나, 내게 어떤 역할이 요구될까, 연극 무대에 서려 해도 시나리오가 만들어지고 역할과 대사가 주어져야 하는데 내 역할이 관객 A, B인 것은 아닌가란 생각들로 몸과 마음이 무겁다."
여러 가지 지표가 2017년에는 호전될 것으로 예상된다. 18대보다는 부담이 없을텐데 19대 대통령 선거엔 나올 생각인가.
"그때 한국나이로 59세라 좀 늦은 감이 있다. 고령화시대일수록 젊은 리더십이 필요하다. 젊은이들은 다른 중요한 일이 많아 정치에 관심이 없지만 일상이 한가한 어르신들은 정치에 참여해서 사회적 자아실현을 하려고 한다. 이때 젊은 리더가 젊은이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줘야 한다. 장관을 40대에 했는데도 일이 많아 육체적으로 힘들었다. 대통령은 더 힘든 자리다."
이번 선거에선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을 것인가.
"사실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다. 장동건과 내 얼굴도 과학적으로 분석해보면 피하지방 몇㎎의 분배, 코뼈 몇㎜의 미세한 차이일 뿐이지만 보기엔 엄청나게 다르다. 대통령 후보들도 신비주의 전략에 따라 아우라가 있어보일 뿐 각 후보군도 별 차이가 없다. 특별한 능력이 있기를 기대하면 낭패다. 대통령 선거도 미모로 비유하자면 장동건과 보통사람의 경쟁인데, 보통사람도 성형수술로 미남으로 거듭날 수 있지만 정신은 성형수술이 안된다. 정신의 미묘하고 미세한 차이가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착한 사람, 착한 영혼의 소유자를 뽑을 것이다. 그래도 잘 하기는 힘들겠지만…."
확실히 유시민 전 공동대표는 부드럽고, 유연해졌다. 하지만 냉소적인 어투는 여전했다. 상대를 향해 푸른 광선을 내뿜던 그의 시선과 신랄한 그의 독설이 그리운 것은 철없는 대중의 변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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