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규 전 중수부장, 노 대통령 표적수사 본질 호도”
2011. 6. 17. 13:25ㆍ사람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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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 전 중수부장, 노 대통령 표적수사 본질 호도” - 문재인 이사장, 이 前 부장 황당 주장 일축…<운명>에선 정치보복의 전말 다뤄
▲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에 출석했던 2009년 4월 30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당시 이인규 중앙수사부장이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구내식당으로 가던 중 취재준비로 한창인 청사 밖을 내다보고 있는 모습. 당일 노 대통령은 오후 1시 20분경 대검에 도착했다. 문재인 이사장은 16일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이 노 전 대통령 소환조사 당시 "예우를 다 했다. 공손하게 잘 모셨다"고 주장한 데 대해 "겸손이 뭔지도 모르고 하는 소리"라며 "(이 전 중수부장은) 겸손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고 밝혔다. 또 이 전 중수부장이 “(당시) 노 대통령의 딸 정연씨가 미국에서 주택을 구입한 것으로 의심할 수 있는 일종의 단서를 받았다”고 말하며 흡사 밝히지 않은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흘리고 있는데 대해 "이미 다 보도까지 됐던 내용을 들어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문제는 노 대통령이 알았느냐 여부인데, 이를 입증할 증거가 전혀 없으니까 (검찰이) 말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검찰과 언론은 여론재판과 마녀사냥을 통해 전직 대통령을 파렴치범으로 몰았고, 이를 통해 노 대통령의 굴복을 받아내려 했다. 이를 주도했던 이인규 전 중수부장은 지금도 황당하고 후안무치한 주장만 되뇌고 있다. 과연 노 대통령 수사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문재인의 운명> 3부 ‘동행’에 이 부분이 잘 드러나 있다. 정치보복의 먹구름 이명박 정부의 노 대통령에 대한 증오와 적대감으로 ‘정치보복의 먹구름’이 몰려왔다. 너무나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서울은 물론 전국에서 촛불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노 대통령은 대단히 신중하고 절제된 모습을 보여줬다. 참여정부에 책임을 전가하는 이명박 정부와 당국자들 발언이 연이어 터져나와 속으로는 마음이 상했을 텐데도 현직 대통령을 존중하고 배려했다. (중략) 대통령도 우리도 촛불시위의 후속 대응이 정치보복이고, 보복의 칼끝이 우리에게 향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대한 이명박 정권의 증오심과 적대감이 그 때부터 시작됐다는 것도 한참 후에 알게 됐다. 촛불시위의 배후로 우리를 의심했다는 얘기 역시 한참 후에 알게 됐다. 정말 놀라운 상상력이고 피해의식이었다. 정치보복의 시작은 참여정부 사람들에 대한 치졸한 뒷조사였다. (중략) 대통령도 당신을 모셨던 사람들이 겪는 고초를 모두 듣고 있었다. 일체 아무 말씀도 안 했다. 대신 사람들에게 가급적 봉하에 내려오지 말라고 했다. 당신은 괜찮으니 괜히 봉하에 왔다갔다하면서 저 사람들에게 찍히지 않도록 하라는 취지였다. 그 속이 얼마나 타들어가고 고통스러웠는지는 나중에 알게 됐다. 오죽 힘들고 미안했으면 유서에 그 마음을 담았을까.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고. 칼끝은 슬슬 대통령에게 겨눠지기 시작했다. 먼저 대통령 기록물을 두고 망신주기가 시작됐다. 역사상 가장 많은 기록물을 남기고 이관한 대통령을 ‘기록물을 빼돌린 파렴치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코미디가 벌어졌다.” 비극의 시작 노 대통령은 퇴임 후 현직 대통령을 배려하고 존중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노 대통령에 대한 악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비극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기업이 표적이 되기 시작했다. … 2008년 7월 태광실업이 세무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검찰수사가 세종증권 매각비리로 확대되면서 대통령 형님 노건평씨가 수사타깃이 됐다. … 형님에 이어 정상문 총무비서관마저 불미스런 일로 엮여 구속됐다. 역시 박연차 회장이 고리였다. … 대통령에게 큰 실수를 하게 된 권 여사님은 우리들에게 너무 면목 없어 했다. (중략) 그 시기 대통령은 좀 이상했다. 당시 대통령도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모르다가, 우리가 사실관계 파악을 위해 권 여사님에게 따져 묻고 권 여사님이 점차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와 같이 사실관계를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 평소 같으면 굉장히 야단을 치고 화를 내실만도 한데,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끝내 우리 앞에서는 큰 소리 한 번 안 치셨다. 나는 그게 이상하게 보였다. 도저히 달관할 수 없는 일을 달관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은 다 내 책임이다. 내가 오랫동안 경제적으로 무능했고, 장래에 대해 아무런 믿음을 못주니 집사람과 정상문 비서관이 그렇게 한 게 아니겠는가. 다 내 잘못이다”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중략) 결벽증이라고 할 정도로 자신에게 가혹했던 분이 당시 상황을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딱하고 걱정이 됐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무죄가 되리라는 확신으로 버텨나가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검찰과 언론이 한 통속이 돼 벌이는 여론재판과 마녀사냥은 견디기 힘든 수준이었다. 대통령을 아예 파렴치범으로 몰아갔다. 검찰에서는 홍만표 수사기획관이 아침저녁으로 공식 브리핑을 했다. 중수부장 이하 검사들도 언론에 수사상황을 모두 흘렸다. 심지어 검찰관계자라는 이름의 속칭 ‘빨대’가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보탰다. 뇌물로 받은 1억원짜리 시계를 논두렁에 갖다 버렸다는 ‘논두렁 시계’ 소설이 단적인 예이다. 사법처리가 여의치 않으니 언론을 통한 망신주기 압박으로 굴복을 받아내려는 것 같았다. 언론은 기꺼이 그 공범이 됐다. (중략) 대통령과 우리는 그때 엄청나게 인내하면서 대응했다. 그 일을 겪고 보니 적절한 대응이었는지 후회가 많이 남는다. 너무 조심스럽게만 대응한 게 아닌가, 대통령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속 시원하게 대변해 드리지 못한 게 아닌가…. 정면으로 ‘전직 대통령을 표적으로 삼은 비열한 정치적 수사다!’라고 하면서 문제를 제기하고, 때로는 수사를 아예 전면 거부한다든지 맞대응을 했어야 되지 않았나 하는 회한이 있다.” 치욕의 날 이명박 정부의 정치보복은 결국 검찰의 노 대통령 소환수사로 이어졌다. 노 대통령은 결국 ‘치욕의 날’을 맞았다. “2009년 4월 30일 아침. 대통령이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대검 청사로 출석하게 됐다. 치욕스런 날이었다. 대통령이 오지 말라고 말렸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여사님은 아무 말도 없이 눈물을 참고 있었고, 대통령은 담담했다. 대통령을 격려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위로는커녕 그만 울음을 떠뜨리고 말았다. 오히려 대통령이 그들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실없는 농담을 건네며 분위기를 바꿔보기 위해 애를 썼다. (중략) 검찰에 도착했다. 이인규 중수부장이 대통령을 맞이하고 차를 한잔 내놓았다. 그는 대단히 건방졌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태도엔 오만함과 거만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중수1과장이 조사를 시작했다. 대통령은 차분하게 최선을 다해 꼬박꼬박 답변을 했다. 대통령의 절제력이 놀라웠다. 검찰의 조사를 지켜보면서 검찰이 아무 증거가 없다는 걸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박연차 회장의 진술 말고는 증거가 없었다. 대통령과 박 회장의 말이 서로 다른데, 박 회장 말이 진실이라고 뒷받침할 증거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중략) 대통령은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박연차 회장에 대해 원망이나 서운한 말씀을 한 번도 안 하셨다. 박 회장도 버티다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궁지에 빠진 것으로 이해를 했다. 박 회장이 언젠가 자유로워지면 모든 진실을 털어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통령이 박 회장의 궁박한 처지를 애써 이해하려 한 이유는 또 있다. 그의 딸들까지 조사를 받았다.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였다고 한다. 또 태광실업이 받은 시설자금 융자 관련 조사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가족과 기업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어르면 버티기 어려운 법이다. 그 날까지의 과정이 견디기 힘들어서 그렇지, 막상 검찰이 기소를 하고 나면 법원에서의 승부는 자신을 했다. 검찰과 언론이 아무리 ‘여론재판’이나 ‘정치재판’을 해도, 법은 법이다. 수사기록의 부실함을 덮을 수는 없는 법이다. ‘사실’이 갖고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무리한 수사나 조작은 한계가 있다. 그 사건이 그랬다. 이길 수 있었다. (중략) 검찰 조사가 끝난 이후에도 아무 처리를 못한 채 질질 끌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검찰도 공소유지가 될 지에 대한 판단을 해봤을 것이다. 그 상태에서 영장을 청구하는 것은 물론 어렵다. 영장이 기각되면 검찰이 그동안 해왔던 모든 수사가 무너져버리는 셈이 된다. 불구속 기소를 하더라도 공소유지가 쉽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아무 처리도 못하고 끌기만 한 것이다. 언론을 통한 모욕주기와 압박 외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중략) 대통령은 어쩌다 그런 곤경에 처하게 됐을까. 나는 대통령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가난했다. 가난이 그를 공부에 매달리게 했고, 가난이 그를 인권변호사의 길로 이끌었다. 그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자신처럼 힘들었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을지 모른다. (중략) 정치에 대한 진정성이 그를 대통령까지 만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 자신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처음에 변호사를 하면서 가난에서 겨우 벗어났지만, 다른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을 돕는 삶으로 빠져들면서 자신은 도로 가난해졌다. 봉하마을은 외진 곳이어서 땅값이 엄청 싼데도 사저 건축비용이 없어 은행 대출을 받았다.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돈도 빌리게 됐다. 대통령은 나에게 ‘내 자신만 정치적으로 단련되었지, 가족들을 정치적으로 단련시키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은 대통령에게 퇴임 이후의 대책이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노 대통령 서거 후 상속신고를 하면서 보니 부채가 재산보다 4억원 가량 더 많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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