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4. 1. 13:22ㆍ사람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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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노무현, 국회의원직을 사임하고자 합니다” - [사료발굴] 1989년 3월 정부 여당의 위법·부당한 행위에 분노, ‘자필로 쓴 사임서’ 얼마 전 <노무현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PDF 파일 하나를 건네받았습니다. 파일 안에는 아주 낯익은, 그러나 평소 봐왔던 것과는 뭔가 다른 격한 감정의 소요가 느껴지는 노 대통령의 자필 문서 스캔본이 들어 있었습니다. 1989년 3월 19일, 초선 의원이었던 노 대통령이 김재순 당시 국회의장에게 보내는 ‘국회의원 사임서’였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되는 사임서는 표지를 포함해 모두 8장으로 돼 있었습니다. 1988년 4․26총선에서 승리하고, 한 달 뒤인 5월 30일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의정생활 10개월 만에 쓴 것입니다. 사임서를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을 노 대통령의 분노와 절망이 얼마나 컸던지, 몇 군데는 오자가 났는데도 새로 쓰거나 수정하지 않고 힘주어 두 줄을 죽죽 그어버리곤 곧바로 말을 잇고 있었습니다. 국회의원 노무현이 얻은 창과 방패, 그리고 모순(矛盾)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가 제안하기는 했지만, 노 대통령에게 국회의원 출마는 “노동자들을 돕는 데 유리할 것”이라는 아주 소박하면서도 확고한 소신에서 출발한 일이었습니다. 1988년 7월 8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질의에서 말했듯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거 입는 거 이런 걱정 안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내딛은 걸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1년도 안 돼 국회의원 사임서를 쓰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를 그토록 분노하고 절망케 했던 것일까요?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노 대통령은 그를 필요로 하는 곳, 그가 있어야 할 곳은 노동현장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분규가 있는 곳이면 전국 어디든 마다않고 발로 뛰었고, 자신의 의지로 잘못된 것이 바로잡히는 모습을 보며 커다란 보람도 느꼈습니다. 재야 운동가 시절의 외침이 ‘창(矛)’이었다면, 의원 신분은 여기에 든든한 ‘방패(盾)’ 하나를 더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게 모순(矛盾)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5공비리특위 청문회 이후 젊고 패기 넘치는 정치인 노무현의 대중적 인지도는 급속도로 높아졌습니다. 각종 뉴스와 신문 지면이 그의 이야기로 도배가 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사회구조를 바꾸고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보장하려는 그의 정치활동 목표는 거기에 없었고, 가난한 고졸 출신 변호사의 드라마틱한 성공담만 윤색되어 있었습니다. 국회의원 노무현의 절망은 현장이 아닌 국회 안에서 이미 거대한 뿌리를 박고 있었습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던 희뿌연 최루탄 연기 한복판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치르던 고된 몸싸움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노 대통령은 <운명이다>를 통해 당시 느꼈던 절망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습니다. 1989년 3월, ‘잔인했던 그 봄날’ “1989년 3월의 어느 봄날이었다. 가로수들이 화창한 봄볕 아래서 싱그럽게 어린잎을 피워 올렸고 하늘빛도 무척이나 고왔다. 오전 본회의를 마치고 국회 정문을 빠져나오다가 버스 정류장에 행색이 초라한 사람들이 우두커니 줄지어 서 있는 광경을 보았다. 수행비서가 ‘상계동 철거민들인데 국회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밀려났다’고 했다. 플래카드를 둘둘 말아들고 맥 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 그 사람들 앞으로 국회의원들의 검은색 승용차가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시트 깊숙이 몸을 묻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과 눈이 마주칠까 두려웠다. 슬픔이 어깨를 짓눌렀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이런 사람들이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막는 국회에 몸담고 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맨몸으로 바닥을 뒹굴며 피땀으로 움켜진 희망이 국회와 정부, 집권여당의 행태에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민정당은 광주조사특위와 5공비리조사특위에 제 발이 저려 불참했고, 노동자에 대한 공권력의 횡포와 부당한 행정 처리는 쳇바퀴 돌듯 반복되었습니다. 또한 노태우 정부는 여야 합의를 거쳐 만장일치로 통과된 법에 거부권을 행사하려고 했습니다. 노 대통령의 자필 사임서는 손발이 묶인 듯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가 세상을 병들게 하는 부조리와, 그로 인해 희생당하는 민중들을 향해 가슴으로 쓴 혈서였습니다. 시대를 향한 외침 “이견 있습니다” 사임서를 재출한 노 대통령은 충주호로, 예산 수덕사로, 강릉으로 발길 닿는 대로 홀로 떠돌며 심한 자책감에 가슴앓이를 했습니다. 시민단체들은 그의 복귀를 촉구하는 성명을 냈고, 거리에서 만나는 국민들도 그의 복귀를 독려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노 대통령은 열흘 만에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권양숙 여사와 문재인 변호사, 부산상고 동기들을 비롯한 여러 분의 간곡한 설득으로 사퇴 철회서를 썼습니다. 훗날 노 대통령은 이때를 “잔인한 봄이었다. 이 사건은 정치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국회의원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인간적 고뇌와 절망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이듬해인 1990년 1월에 노태우(민주정의당)와 김영삼(통일민주당), 김종필(신민주공화당)의 3당합당이 이뤄졌습니다. 통일민주당의 합당 결의장에서 국회의원 노무현은 “이견 있습니다. 반대 토론을 합시다”를 외쳤습니다. ‘야합’이라는 골리앗을 향한 정면대결이었고, 굴곡진 현대정치사에서 정치인 노무현의 외롭고 고단한 투쟁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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