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얼음 위를 걸으며 다섯 달을 보내다

2011. 3. 13. 15:30관심사

살얼음 위를 걸으며 다섯 달을 보내다

갑사동네서 치매노모랑 살기 2011/03/08 15:53 이프

 

어머니와 이곳에서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고비가 몇 차례 있었다. 두 달을 넘기실 수 있을까, 해(2010년)를 넘길 수 있을까, 백일을 넘길 수 있을까... 살얼음 위를 걸으면서 그새 다섯 달이 되었다.



요양소에서 방 안에만 갇혀 지내신 게 안쓰러워 이곳에 오면 수시로 휠체어 산책을 나갈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짐을 줄이고 또 줄이는 와중에도 겨울산책에 대비해 30여 년 전 큰 올케가 혼수로 어머니께 사 드린 밍크코트도 챙겨 오고 넉넉한 어그부츠도 사놓았다.

그런데 웬 걸. 기침가래 때문에 가을이 깊어가면서부터 일체 외출을 삼가고 집 안에서만 사신다. 그나마 가을볕이 따스할 때는 거실 소파에도 누워계셨지만, 날씨가 차가워지면서는 꼬박 방에만 갇혀계신다.



온도가 일정한 방안에서만 지내는데도 어머니의 생체리듬은 일정하지 않았다. 기침가래, 혈뇨, 음식거부, 발열 등이 때때로 찾아와 어머니를 괴롭힌다. 얼굴이 붉어지고 손이 뜨겁고 가래가 심한 날이 있는가 하면, 그 다음 날은 열이 내렸다. 일주일 안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2주 후의 행사는 미뤄야 하는 거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을 하다 보면 이삼일 후엔 조금 기운을 차리신다.

혈뇨 때문에 구급차를 불러 입원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고민하다 보면 얼마 뒤엔 증상이 사라졌다. 눈이 작아지고 힘없이 풀어져 있다가도 며칠 뒤엔 다시 눈을 크게 뜨고 힘이 생긴다.

아... 어머니, 어머니도 지금 나처럼 결사적으로 봄을 기다리고 계신 거지요? 춥고 길었던 겨울을 견뎌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 닭장 올라가는 비탈길에 예쁜 새싹친구들이 모여 있네요.




천상병 시인처럼 그렇게 가세요.



천지사방이 생명의 소리로 와글와글할 때, 그때 우리 소풍 나가요. 꽃이 흐드러지게 핀 나무 아래서 딸 친구들이 춤도 춰드린답니다. 아, 숲으로 올라가는 닭장 근처에 자리를 깔면 병아리들도 같이 놀 수 있겠네요. 어머니도 우리랑 깔깔대다가 천상병 시인처럼 노래하며 가세요.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내는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우리도 어머님 가시는 날, 박수치며 보내드릴께요. 나 역시 언젠가 그 날이 되면 지인들의 따스한 미소와 박수 속에 떠나렵니다. 죽음이란 슬퍼할 일도 두려워할 일도 아니더라고요.



어렸을 때 처음 죽음의 의미를 알고 나선 엄청난 공포에 휩싸였었지요. 나 자신을 비롯해 ‘있던 존재가 없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던지요. 그러나 이제는 압니다. 수 만 년 간 살아있던 존재들이 죽었기에 내가 태어나 살 수 있었고 또한 내가 죽어야 다른 생명들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 안의 불성, 신성이 우리의 진면목(眞面目)이고 우리 모두의 본래모습이며 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그래서 석가모니는 깨달은 직후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너도 나이며 나도 나이니 천지간에 모두 나뿐이로구나’라고 했다지요. 살아있는 동안 부지런히 너와 나 속에 있는 진면목을 찾게 된다면, 내 안에 깊이 잠든 하늘을 깨울 수 있다면 그건 참으로 생명 받은 동안 ‘남는 장사’를 한 거지요. ^^

                                     

잘못 끼운 단추를 제대로 끼우다



2월 마지막 월요일로 잡았던 이주여성들과의 만남은 무산되었다. 엽서를 보내고 이장님들에게 문자를 보내어 도움을 청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오지 않은 것이다. 진료가 없는 월요일로 날을 잡고 간단한 간식을 준비하고 기다렸는데 시간이 되어 찾아온 사람은 단 한 사람. 그녀는 월요일 휴진인 것을 모르고 찾아온 환자였다.



그런데 그녀를 치료하며 이야기하다가 소중한 정보를 알게 되었다. 요즘은 겨울에도 모두 비닐하우스에서 깻잎이나 딸기를 따기 때문에 늘 바쁘다고 한다. 그런데 서울 도매시장이 일요일에 쉬니까 토요일에는 작업을 하지 않는단다.




▲한의원 옆에 있는 딸기하우스. 지하수로 난방을 하는데 1월 딸기가 가장 달다고.


▲딸기 하우스 옆의 깻잎하우스. 겨울 깻잎에는 농약을 치지 않아도 된다.



알고 보니 그녀는 10년의 부녀회장 경력을 가진 계룡면 주부모임회장. 이장들은 수 없이 들어오는 문자 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함께 따라온 이장출신 남편이 거드신다. 그러니 다시 계획을 세워야 했다.



부녀회장님들에게 미리 전화를 해서 안내를 부탁할 것. 가능하면 함께 와 주셔도 좋을 것이다. 다시 잡은 날짜는 3월 19일. 토요일 오후.  



한 번 실패는 병가지상사라. 애당초 상대의 입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내 위주로 계획을 짰던 것이 잘못이었다. 그런데 잘못 끼워진 첫 단추를 침을 맞으러 온 주부모임회장님이 바로 끼워주고 협조를 약속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또 도와주시다니. 에헤라 디여~  휴진하는 날 잘못 찾아온 환자가 이렇게 핵심적인 인물일 줄이야.




                                                                                                                    -고은광순

 

http://blog.ohmynews.com/feminif/359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