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대통령이 세상을 놓은 심정과 내 심정 똑같다”

2010. 12. 21. 15:39사람 사는 세상




“노대통령이 세상을 놓은 심정과 내 심정 똑같다”
- [양정철의 특별한 만남1] 한명숙 전 이사장... “보복 정치수사, 이것도 운명”



한명숙 총리를 만나러 가면서 문득 노무현 대통령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노 대통령은 퇴임 직전, <오마이뉴스>와 장시간의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언론사와는 마지막 인터뷰가 된 셈입니다. 인터뷰어인 오연호 대표가 정치적으로 아주 민감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개인적으로,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십니까?”

당시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한창일 때였습니다. 옆에 배석해 있던 저는 오 대표에게 대단히 불편한 눈빛을 노골적으로 보냈습니다. 대선에 영향을 줄만한 질문은 안 하기로 사전에 신사협정이 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숙고하던 노 대통령은 오프더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이렇게 답했습니다.

“한명숙 총리 같은 부드러운 지도자가 되면 좋을 것 같아요.”

대통령 말씀이 보도돼선 안 된다는 걱정에 빠져있느라, 당시엔 그 뜻을 깊이 있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훗날 그녀를 <노무현재단> 이사장으로 모시면서, 왜 노 대통령이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속은 한 없이 강하면서 겉은 한 없이 부드러운 여성, 화려한 이력과는 달리 수많은 시련과 인생역정을 강단 있게 버텨온 정치인, 견디기 힘든 고난을 지금도 홀로 묵묵히 감당하고 있는 지도자. 그녀를 영등포의 한 사무실에서 단 둘이 만났습니다. 적지 않은 시간을 모셔봤지만, 저도 모처럼 갖는 오붓한 데이트였습니다.

한명숙의 첫 인터뷰…둘 만의 오붓한 대화

양정철(이하 양) : 바쁘실 텐데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방선거 때 의례적으로 하신 걸 빼면 요 몇 년 새 인터뷰는 처음이시죠?

한명숙(이하 한) : 네. 지방선거 때 후보로서 선거 인터뷰한 걸 빼면 처음이네요.

양 : 영광입니다.(웃음) 계속 큰일 치르면서 건강에 무리가 갔을 텐데, 좀 괜찮으세요?

한 : 지난번 1차 재판 때 선거 앞두고 집중심리를 하니까 일주일에 서너 번씩 재판을 했어요. 신체적으로도 상당히 무리고, 심리적으로도 엄청난 압박이었죠. 체중도 많이 빠지고 에너지가 소진됐어요. 재판 끝나자마자 곧바로 선거모드로 전환을 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선거기간 동안 거리에서 만난 시민들이 너무 열광적으로 환영해 주고 또 ‘반드시 이겨야 된다.’는 시민들 바램이 컸기 때문에 나중엔 하루하루 에너지가 보충이 되더라구요. 선거 끝날 때쯤엔 오히려 원기가 충천했어요. 시민들의 지지, 국민들의 열망, 이런 걸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인가 하는 것을 새삼 느꼈어요.

양 : 지금은 어떠세요?

한 : 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마음은 편치 않습니다.

양 : 또 정치재판이 시작됐습니다. 마음이 참담하시겠어요.

한 : 그렇습니다. 이번 재판은, 지난번 무죄판결 받기 하루 전에 (혐의) 발표해서 시작된 재판이죠. 제 무죄판결 희석시키려구요. 또 무죄판결에 대한 일종의 보복인 셈이죠. 한번 받는 것도 너무나 힘든 일인데 두 번째로 또 엮어놓으니까 정말 분통이 터지죠. 제가 노무현 대통령 시절 총리를 지낸 것 때문에 정적의 개념으로 화살의 타깃이 되고 있는 건데요. 노무현 대통령 떠나시면서 끝날 줄 알았던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 저를 중심으로 계속 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건 운명인가보다.’ 받아들이려고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 번, 있지도 않은 일을 안 했다고 주장해야 되는 상황이 너무 억울합니다.

지난 해, 검찰의 첫 정치보복 수사 때 저는 <노무현재단> 사무처장 겸 <한명숙 공대위> 대변인을 겸해 일을 도왔습니다. 당사자는 힘들었겠지만, 저에겐 평소 몰랐던 그녀의 인생과 신념을 접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당시 “제가 인생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다.”는 말은 그녀의 정직과 도덕을 웅변하는 상징적 한 마디였습니다. 참으로 당당했고, 누구에게 짜증 한 번 없이 침착하게 그 상황을 이겨냈던 그녀였지만, 사람인지라 같은 일을 두 번 겪어야 하는 처절함이 살짝 묻어있었습니다.

양 : 모두진술이 심금을 울렸습니다.

한 : “(노 대통령의 서거 전 정치수사가) 세상을 버리고 싶을 만큼 고통스런 시간이셨을 텐데, 지금 저도 그렇습니다.”고 말했어요. 왜 그렇게까지 말했냐면, 노 대통령 돌아가셨을 때 ‘이렇게 가셔도 되는 것인가.’ ‘버티셔야지, 우리들만 남겨놓고 가셨나’ 하는 원망 같은 게 솔직히 한 구석에 있었거든요. 그러나 제가 거의 똑같은 일을 당해보니까 그때 대통령 선택하셨던 그 길이 ‘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겠구나.’라고 이해가 가더라구요. 똑같은 경험 속에 제가 빠져있다 보니.


“나에 대한 보복수사, 이것도 운명”

양 : 이해가 갑니다.

한 : 저희가 돈을 먹고 정치를 한 것이 아니죠. 양심, 도덕, 명예 같은 것이 인생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국민들 원하는 기준에서 살아왔다고 자부하거든요. 그것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모욕주고 흠집 내고 도덕성을 추락시키는 음모를 엮고 있으니 견딜 수가 없는 거지요. 아마 노 대통령님도, 당신이 괴로운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주변사람들이 너무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다 보니까…. ‘그것을 보는 심정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새삼 들어요. 노 대통령 유언의 맨 앞이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이렇게 시작하잖아요? 오죽하면요. 지금 저도 심정이 똑같아요.

양 : 한 번도 이겨내기 힘든 정치적 보복수사를 두 번이나 반복해 당한다는 것이 누구라도 쉽지 않은 일일 겁니다. 그런데도 밝고 여유 있는 모습을 잃지 않고 계세요. 무슨 힘으로 버티고 계세요?

한 : 하나님께 기도를 할 때 심정이 제일 편안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제 마음을 아실 테니까. 또 제가 어떤 행동을 하고 살았는지 아실 테니까요. 그렇긴 해도, 워낙 터무니없이 당하는 일이고 올가미여서 분하고 마음의 외상도 커요. 저는 지금 어떤 예감을 가지고 있냐면요, ‘두 번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정권 끝날 때까지 세 번 네 번 올가미가 씌워질 수도 있겠다.’는 예감을 합니다.

양 : 그렇게까지 생각을 하세요?

한 : 네. 하지만, 노 대통령 가신 게 너무 안타깝고 억울한데, 저라도 버텨야 된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노 대통령 가시고 ‘지못미(지켜드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한명숙이라도 지켜야 되겠다는 국민들이 제 주변에 울타리를 쌓고 격려를 보내고 계셔서 그 성원의 힘으로 버티고 있는 것 같아요.

양 : 과거 유신 시절 구속돼 중앙정보부에서 필설로 하기 어려운 고초를 겪었죠. 그때 당했던 끔찍한 고문과 지금의 몹쓸 수사, 어떤 게 더 힘드세요?

한 : 무서운 고문까지 당하면서 신체적으로나 심리적 공포심으로 보면 그 때가 몇 배나 고통스러웠죠. 그래도 그땐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지키기 위해 싸웠기 때문에 아무리 고통이 커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었거든요. 지금은 ‘더러운 정치인’ ‘돈 받아먹은 부패정치인’ 이미지로 저를 올가미 씌우니까, 어떻게 보면 그때보다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양 : 네, 그러실 것 같아요.

한 : 그런데 저는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민주화운동 할 때나, 국회의원 장관 총리 할 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평범한 시민들이 아끼고 절약하면서 풍족하지 않게 사는 모습과 다를 게 없거든요. 아무리 뒤져도, 가지고 있는 재산도 별로 없고요. 이 사람들이 아무리 ‘부패한 정치인’으로 어떻게 뒤집어씌우든 ‘나의 삶과 나의 정신은 변하지 않는다!’ ‘양심과 신념이 있기 때문에 당당할 수 있고 떳떳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뒤져도 당당하고 떳떳”

양 : 최근 사랑하는 두 분 대통령 잇따른 운명에, 리영희 선생님까지 떠나보내면서 상실감이 누구보다 크시겠어요.

한 : 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역사의 커다란 한 페이지가 넘어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죠. 두 분 대통령, 리영희 선생님 모두 우리가 추구했던 진보의 좌표를 제시한 분들이시잖아요. 때문에 이제는 그 몫이 우리에게로 넘어왔다, 한 페이지가 넘어가고 그 다음 페이지가 살아남은 자들에게 주어졌다, 살아남은 자들이 그 역사를 짊어지고 가야 하는데 저도 이젠 선배로서 서 있다, 이런 생각에서 막중한 책임감 같은 것을 느껴요. 그러한 책임을 질수 없도록 두 발목이 완전히 잡혀있으면서도 몸부림치는 제 자화상도 함께 느껴지구요.

국민들 기억에 남는 그녀의 여러 모습 가운데 가장 강렬한 한 컷은 노 대통령 국민장 조사를 읽는 모습일 겁니다. 대통령과 총리, 서거한 대통령과 장의위원장, 고인과 살아남은 자의 조사. 그 기구함을 상상이나 했을까요. 얘기가 그 쪽으로 옮아갔습니다.

양 : 많은 국민들 가슴에 노 대통령 국민장 조사를 울먹이며 읽어 내려가던 모습이 애잔하게 남아 있습니다. 참 어렵게 조사를 읽었던 당시 심경이 어땠습니까?

한 : 국민장의위원장을 맡았는데 일이 너무 많아 슬퍼하고 눈물 흘릴 겨를조차 없었어요. 조사 초안 완성되고 나서, 읽는 연습을 하는데 끝까지 못 읽겠는 거예요. 계속. 조금 읽다가 울음이 나오고, 또 읽다가 눈물이 주루룩 흐르고. 당일 국민장 시작되고 조사 읽을 순서가 왔는데, ‘울지 않고 끝까지 읽어야 되겠다.’ 오로지 그 생각 하나로 자리에 섰어요. 그런데 뭘…. 이를 악물고 읽기 시작했는데, 되겠어요? 그동안 참았던 북받침이 막 올라오는데…. 아휴, 참….

양 : 조사 초안에 여러 내용을 직접 넣으신 걸로 기억하는데요.

한 : 대한문 시민분향소에 일부러 갔던 적이 있었어요.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시민들의 추모리본을 보고 너무 큰 감명을 받았어요. 굉장히 바쁠 때였는데, 한 시간 남짓 걸으면서 꼼꼼히 읽어봤어요. 그 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장의위원장 조사라는 게 별게 있겠는가. 이 많은 시민들이 절절하게 여기 써 놓은 말, 눈물, 목소리. 이게 다 조사구나.’ 그 때 리본에 쓰인 글 가운데 감명 깊었던 문구를 집어넣었습니다. 노 대통령 조사는 윤태영 대변인이 초안을 잡고 내가 손을 봤지만, 대체로 시민들의 말을 제가 대신 한 것뿐이라고 생각을 해요.

양 : 모셨던 대통령의 장의위원장을 맡는 운명이 기구합니다.

한 : 상상이나 했겠어요? 돌아가시고 나서도요. 그러나 현실로 닥쳐왔고, 또 장례식은 치러야 하니까. 그 때 있었죠? 봉하마을에서 다 같이 모여 회의를 하는데요. ‘노무현 대통령 살아 생전에 너무나 기구하시고, 고생하시고, 숱한 정치역정을 거쳐 시련과 고난을 많이 겪으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시는 길은 좀 편안하게 보냈으면 좋겠다. 편안한 사람이 장의위원장을 맡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그 짐이 저에게 씌워졌습니다. 그 분위기에서 그걸 거절할 수도 없고 장의위원장을 맡게 됐죠.


“눈물의 조사, 시민들 마음을 대신 한 것”

양 : 바로 직전 국민장인 최규하 전 대통령 장의위원장도 맡지 않으셨던가요?

한 : 네. 정말 비통하고 희한한 일인데요. 그 때(최 전 대통령 국민장) 제가 총리여서 장의위원장 맡고 바로 거기 그 자리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똑같은 자리에서. 그 바로 뒤에 노무현 대통령님 내외분이 앉아계셨었거든요. 그런데, 똑같은 그림인데…. 똑같은 장소에 똑같은 그림이고, 검은 옷 입고 그 자리에서 조사를 하려는데 노 대통령님이 안 계신 거예요. 순간적으로 원고도 없는 첫 마디 “노무현 대통령님! 대통령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이렇게 시작을 했습니다.

재판 얘기를 할 때 또박또박 단호하게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노 대통령 얘기로 옮아가자 자주 잠겼습니다. 당시를 회고하는 듯한 눈가가 촉촉해 졌습니다. 목이 잠겨 대화 도중 몇 번이나 물약을 삼켰습니다.

양 : 처음 서거 소식 어떻게 접하셨어요?

한 : 네, 5월 23일 날. 전혀 모르고 있었지요. 아침에 보좌관한테 전화가 왔어요. ‘노무현 대통령님이 어떻게 되셨다’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총리님. 지금 빨리 뉴스 틀어서 보십시오.”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그랬더니 “지금 시간 없으니까 빨리 뉴스부터 보세요.” 라면서 끊어요. 뉴스 틀었더니, 대통령님이 추락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져서 ‘아, 사고가 났구나. 산에 올라가시다가 떨어지셨나?’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이 채 못 돼서 ‘사망’ ‘추락사’ 이런 얘기가 나와요. 온 몸이 벌벌 떨려서 안희정씨한테 전화를 했죠. 그랬더니 자기도 내려가고 있는데 빨리 내려오시라고. 가방하고 옷만 입고 무작정 내려갔습니다. 병원으로.

양 : 마지막 뵌 게 언제였습니까?

한 : 5월 2일이요. 갔더니, 여사님은 고통 때문에 체중이 많이 빠지시고 참 초췌하셨어요. 눈가에는 계속 눈물이 어려 계셨고. 대통령님께선 이미 상당히 많은 부분, 상황을 소화하시고 ‘나를 버리라’ 이런 말씀을 하신 뒤라 마음 정리하고 뭔가 초탈한 듯한 느낌이셨어요. 그때 어떻게든 힘을 드리려고 마음속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를 해드렸다고 했는데 대통령님께서는 “위로를 해줘서 고맙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세요. 그런데 뭐가 위로가 됐겠습니까, 제 말이?

양 : 회한으로 남는 일이 있나요?

한 : 두고두고 후회가 되는 게…. 제가 지금 이러한 상황을 겪고 보니까…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이런 것을 겪게 됩니다. 음…. 다 없고 혼자 있을 때라든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지샐 때라든지, 새벽에 깨서 생각에 잠길 때라든지, 이럴 때 정말 처절한 기분이 들어요. 대통령님이나 여사님께 우리들이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런 마음의 위로, 힘을 드릴 수 있도록 뭔가 해드렸어야 되는데…. 그런 것을 해드리지 못한 것이 참으로 후회가 됩니다.

양 : 전무후무한 500만 조문인파를 보면서 장의위원장으로서 소회가 남달랐을 텐데요.

한 : 상상을 못 했죠.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상상을 못 했어요. 돌아가신 날이 토요일이었는데 봉하에 임시로 조촐하게 분향소를, 참 초라했지요. 그때부터 일요일까지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어요. 날씨도 참 더웠는데. ‘주말이니까 이렇게 많이 오셨구나. 월요일부터는 좀 한가해지겠지.’ 그런데 아닌 거예요. 시간이 갈수록. 상상할 수 없는 인파뿐만 아니라 조문객들의 표정과 행동, 말, 하나하나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서글픔과 애잔함 안타까움 같은 것을 갖고 오신 게 느껴지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신기할 정도의 일이 벌어진 거죠. 그 몇 초 조문하려고 몇 시간 달려오고, 또 몇 시간 줄 서고. 그 뙤약볕에서. 누구도 불평 한마디 없이. 그걸 뭐라고 표현해야 될지….

“직접 겪어보니 더 큰 위로 못 해드린 게 후회”

양 : 국민장의위원장으로서 정말 큰 일 치르신 겁니다.

한 : 봉하마을 이재우 조합장님 사랑방 하나 얻어 가지고 내내 있었죠. 하루 두 세 시간이나 잤을까요? 매일.

양 : 정부와의 장의절차 협상도 참 힘들었죠?

한 : 서울광장 노제 협상이 제일 힘들었죠. 별별 트집을 다 잡았는데 우리가 많이 양보를 했어요. 대통령님 편하게 보내드리기 위해서. 광장 노제도 당일 아침에 허가 났죠. 나중엔 저도 화가 치밀어서 격하게 소리를 지르고. 당시 장관이 자신의 목을 걸고 허가하겠다, 이래가지고 새벽인가 아침에서야 서울광장 노제가 허용됐죠. 봉하에서 운구행렬이 서울로 올라왔는데, 온통 노란 물결이예요. 소름끼칠 만큼 장엄하고 엄숙했어요. 차 안에서 그 모습 보다가 “노무현 대통령님, 저 노란 물결이 보이십니까?” 이런 말이 생각나 조사에 집어넣었죠. 가슴에 남는 장면이 한 둘이 아니예요. 사람이 기운이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신체적으로 어려워도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힘이 나는 걸 그때 느꼈죠.

양 : 국민장 끝나고 몸져누워 한 동안 고생하셨는데, 통한의 터널을 빠져 나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셨죠?

한 : 장례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통곡을 하고 큰소리로 울고 그랬어요. 우리 참모진들도 그렇고. 저는 그때 제대로 울지도 못해서 그런지, 장례 끝나고 몸져누워서 많이 아팠는데, 침대에 혼자 누워서 아프면서도 그냥 소리 내서 엉엉 몇날 며칠을 울었습니다. 아직까지 치료되지 않은 마음의 상처가 다 치유되기 위해선 시간도 오래 걸리고, 노 대통령이 원하던 사람사는 세상의 모양을 좀 갖추어야 이 병이 없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양 : 권양숙 여사님 만나면 두 분이 말없이 눈물로 포옹하는 모습 많이 봤습니다. 애틋한 뭔가가 서로 있으시죠?

한 : 대통령님이 그렇게 돌아가셨기 때문에 여사님이 떠안은 짐이 혼자 짊어지기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무겁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보다도 많이 위로받고 다시 일어나셔야 되는데…. 요즘 뵈면 그래도 많이 극복을 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반갑지만, 가슴에 남겨진 상처가 죽을 때까지 지워지겠습니까? 그래서 항상 여사님 뵈면 ‘저라도 잘 버텨서, 대통령님이 당하신 것을 저라도 잘 극복해서 보여드려야 되겠구나.’ 하는 책임감이 들어요. 제 보복수사 시작됐을 때 저한테 ‘너무너무 살이 떨린다.’고 그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양 : 총리로서 함께했던 노무현 대통령님은 어떤 느낌, 어떤 체온으로 남아있나요?

한 : 저는 노무현 대통령님과 개인적 인연이 별로 없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때 같은 국무위원으로서 일했던 정도? 개인적인 관계가 별로 없어요. 환경부장관 임명 받고, 그리고 총리가 돼서 일을 하게 됐죠. 노무현 대통령을 보면, 우선 양심적이고 솔직한 사람이에요. 너무나 양심적이어서 거짓말이라든지 거짓말 비슷한 거라도 전혀 할 줄 모르는 그런 사람이고요.

양 : 특별히 어떤 기억이 오래 남습니까?

“대추리사태 해결, 9개월을 기다려 준 대통령”

한 :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 문제죠. 제가 총리로 들어가니까 엄청난 갈등 사안이었는데요. 그 전에 이미 대화하다, 하다, 안 되니까 강경하게 대처방안이 서 있더군요. 공권력 투입 쪽으로. 제가 ‘이 사태를 대화로 좀 해결해보고 싶다, 1주일의 말미만 달라’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대통령께서 ‘1주일은 기다릴 수 있다. 한번 시도를 해보시라.’ 그러시네요. 애를 썼는데 그 엄청난 일이 1주일 가지고 되겠어요? 그러니까 여러 기관에서 대화기조 때문에 시간만 허비되고 있으니 원래 계획대로 해야 된다는 보고가 대통령한테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대통령께 가서 “이 일은 역사적인 일이고, 역사에 기록으로 남습니다. 저한테 조금 더 맡겨두시면 모든 힘을 다해 최대한 대화로 풀어보겠습니다.” 얘기를 했어요. 하루인가 이틀인가 지났는데 대통령께서 제 손을 들어주신 거예요. ‘역시 노무현대통령, 참 괜찮은 사람이다. 원칙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생각을 했죠. 그런데 한쪽으로는 겁이 나는 거예요. 대화로 해결해야 될 텐데 할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9개월 만에 해결이 됐습니다. 한 달도 아니고 두 달도 아니고 9개월을 대통령님이 기다려주신 거예요. 국정운영에 대단히 부담이 됐을 텐데도. 원칙을 지키고.

그녀의 자서전 출간작업을 도와드리기 위해 원고 초안을 검토하면서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민주화운동, 여성운동, 국회의원, 장관, 총리 등 파란만장한 삶은 알았지만, 성장기의 고난과 젊은 시절의 고생이 그리 컸는지는 몰랐습니다. 외모가 부잣집에서 곱게 큰 이미지라 뜻밖이었습니다. 개인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양 : 자서전에서 소개하신 걸 보면, 성장기가 가난과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한 : 부모님이 평양에서 피난 내려오셨죠. 평양에서 자랐던 제 어린 시절을 두 분께 물어봤더니, 이북에서 부모님 모두 지식인이셨고, 대단한 부자였고 상류층으로 살았대요. 그런데 맨 손으로 피난, 아니 피난이라기보다 한두 달 피해 있으면 어떻게 해결이 되겠지 싶어 잠시 내려온 이후 여기서 살게 된 거지요. 그러니까 가난할 수밖에요. 굉장히 가난하게 살았는데, 가난하게 살면서도 아이들 학교를 보내야 된다는 학구열이 굉장히 높으셔서 저희 6형제 모두 대학교육까지 시키느라 어머니가 고생을 하셨지요. 그렇게 가난했지만 그때는 대체적으로 다 가난했기 때문에 다 그런가 보다, 싶었고요. 원망을 하거나 그러기 보다는 더 열정적으로 악착같이 살아보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양 : 대학진학 이후 줄곧 여성운동에 몸담으셨는데, 그 선택은 보람 있게 생각하시죠?

한 : 여성이라는 집단이 한국 사회에서 굉장히 소외된 계층이지요. 약자구요. 제가 가난하게 살고 여성으로 살았기 때문에 약자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그 사람들의 어려움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죠. 대학 졸업하자마자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여성교육 받으면서 잠자고 있던 의식이 완전히 깨어났다고 할까요? 그렇게 해서 여성운동을 하게 됐어요.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소외된 인간으로 사는 것인가 깨닫고, 여성들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시작하게 됐고, 지금도 그 관심은 계속 가지고 있고요. 상당히 보람을 느끼고 있지요.



“가난을 원망하기보단 더 열정적으로 살아”

양 : 평생의 동반자인 박성준 교수님을 대학 연합서클에서 만난 걸로 아는데 첫 만남이 궁금합니다.

한 : 남편은 통영이 고향인데 독학을 열심히 해서 서울상대 경제학과에 들어간 상대생이었고, 저는 이화여대생이었는데, 함께 서클을 만들었어요. 기독교 서클. 그 서클에서 남편이 회장을 하고 제가 부회장을 했어요. 그래서 알게 됐는데 좋아지게 돼서, 남들 한참 몰래 연애를 했지요.

양 : 박 교수님이 구속되고 무려 13년 6개월을 생이별로 헤어져 기다리셨습니다. 지금 관념으로 보면 상상이 안 됩니다.

한 : 남편하고 결혼식을 했는데 남편 고향인 통영까지 가서 혼인신고를 해야 하거든요. 그 전에 구속이 됐어요. 그래서 법적으로는 부부가 아닌 거였어요. 그냥 사실혼인 거죠. 고무신 바꿔 신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웃음) 남편이 감옥에 갔으니 면회를 해야 되는데, 안 시켜주는 거야. 부인 아니라고. 그래서 사실혼 입증을 위한 결혼식 사진, 주례가 있던 사진 그런 걸 다 첨부해서 겨우 내가 부인이라는 걸 입증하고 면회했던 기억이 나요. 제가 그렇게 오래 기다렸던 것은, 남편이니까. 우리 부부고. 그런데 부부이면서 연인이면서, 그리고 동지였어요. 그래서 그냥 한눈에 마주쳐서 애인이었다가 결혼한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결속이 있었죠. 우리가 바라는 꿈이 같고, 동지였기 때문에. 기다린다는 개념보다는 그냥 그 사람은 그 안(교도소)에서, 나는 밖에서 같이 일한다는 개념? 그런 게 강했던 것 같아요. 남편이 감옥에 있는 동안 그냥 앉아서 편지만 쓰고 기다린 게 아니라, 열심히 사회운동 하면서 제 인생에서 가장 봉우리가 싹트고 꽃이 피는 그런 시기였어요. 남편을 감옥에 두고 가장 열정적으로 일을 했던 시기였으니까.

양 : 지금 두 분만 집에 계시는데, 아내로서 주부로서 모습이 궁금해요.

한 : 저요? 저는 음식도 잘하고 청소도 잘 하고. 다 잘 하는데요. 남편은 남편대로 일이 있고 저는 저 나름대로 일이 있어서, 서로 구속하지 않고 존중하며 살아요. 아침밥 같이 먹고선 나와서 각자 일하는 거지요.(웃음) 주부로서의 모습은 좀 별로?(웃음) 제가 한 번도 김장을 걸러보질 않았어요. 항상 직접 했어요. 제가 이북김치를 하는데, 남편이 거기에 길들여져서 꼭 그 김치를 먹고 싶어 해요. 그런데 올해는 여기저기서 많이 해다 줘서 김장도 아직 못 했어요.

양 : 13년 여 생이별로 아들을 늦게 보셨는데, 애틋하시겠습니다.

한 : 누구나 자기 자식은 그런데, 저는 마흔에 아이를 낳았거든요. 그 아이가 성장해서 성인이 됐는데요. 사회활동을 열심히 하다보니까 아이에게 시간을 많이 못 줬어요. 클 때 같이 못 있어줘서 미안한 마음이 늘 있죠. 하지만 그래서 그런지 아이가 독립심이 강해요. 자기 일을 자기가 결정하고 판단하고 그렇게 하니까 괜찮다 싶은 생각도 들어요.

양 : 지난번 검찰이 애꿎은 아들까지 고생을 시켰는데, 어머니로서 마음이 찢어졌겠습니다. 한 : 그게 제일 마음 아팠죠. 이번 재판도 똑같지 않을까 생각이 들고요. 다행인 건 아이가 그런 일을 겪었기 때문에 더 성장한 것 같아요.

이 대목에서 작년 검찰수사 때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 모진 상황에서 표정 하나 변함 없이 의연하게 대처하고 맞서던 그녀가 어느 날 몹시 힘들어하고 노기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검찰이 아들 홈페이지를 뒤지고 말도 안 되는 내용을 언론에 흘렸던 날이었을 겁니다. 벨벳을 두른 철의 여인 같았던 그녀도 어머니였던 겁니다. 자신의 고통은 감내하지만 자식에겐 한 없이 약한 모정….

양 : 어렸을 때 꿈이 선생님이셨다죠?

한 : 제 꿈은 가르치는 일 하고 쓰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글을 쓰고 싶은 걸 지금도 포기하지 않고 있어요. 지금 재판에 걸려 있어서 시간을 못 내지만 좋은 글 쓰는 것을 앞으로의 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가르치는 일도 박사학위 논문 쓰다가 논문 제출을 코앞에 두고 정치에 입문해 포기하게 된 것이죠. 사실 저는 그 논문이 끝난 다음에 학생들 가르치면서 사회운동을 하려고 했었는데 바뀌어졌습니다.

“결혼 후 처음으로 김장 걸러”

양 : 지금 감당하고 있는 시대의 무게랄까, 안고 있는 것들을 다 내려놓고 싶을 때는 없나요?

한 : 정말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하고 싶어요. 지금까지 시대와 역사가 지우는 짐을 무겁게 져 왔어요. 할 수 있는 일은 성심껏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해결해야 할 시대의 과제가 숨가쁘게 밀려오고, 국민들은 편치 않은 삶을 살고 있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짊어진 멍에가 힘겹다고 마음대로 벗어 던지거나 시대의 소명을 피해 가기는 어렵겠죠.

양 : 부엉이 모으는 취미가 궁금합니다. 얼마 전 산행에서 부엉이 만난 일도 재미있더군요. 부엉이 인형, 부엉이 바위, 부엉이와의 희귀한 조우…좀 이상하지 않나요? 노무현 대통령과의 어떤 운명 같은 인연을 믿는 편인가요?

한 : 네. 부엉이를 중심에 두고 예사롭지 않은 일이 좀 있었어요. 지난 11월 초 친지들과 지리산에 있는 산장에서 하룻밤을 잔 적이 있는데요. 아침 산책을 하다 계곡의 큰 바위에 앉아있는 부엉이를 만난 거예요. 밤도 아닌 아침에. 더구나 나뭇가지도 아닌 바위에 앉아 있는 부엉이를 본 게 너무 신기해 바로 팔을 뻗으면 만져질 만큼 가까이 다가갔는데 날갯짓을 한번 하고는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함께 간 친지들이 “노대통령께서 우리를 맞으러 나오신 것 같다”고 말했었죠. 부엉이에 남다른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3년 전 가족과 함께 미국에 머물며 공부하고 있을 때였어요. 아들이 학교에서 사귄 친구의 아버지가 원래는 중세문학을 전공한 학자였는데 새 연구에도 심취해 있었어요. 하루는 그 집에 초대를 받아 갔는데 이 분이 숲 속의 부엉이를 불러오겠다며 부엉이 울음소리를 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말 부엉이가 날아와 집 마당의 나뭇가지에 내려앉아요. 깜깜한 밤이라 모습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암흑을 꿰뚫는 형형한 눈빛에 아주 강렬한 인상을 받았어요. 며칠 뒤 집 마당에 쓰던 물건을 펼쳐놓고 파는 ‘가든 세일’에서 우연히 부엉이 인형을 보고 1달러를 주고 샀어요. 그 뒤로는 어디 여행을 가도 부엉이 인형이 눈에 띄면 사기 시작했죠. 알음알음 소문이 나니까 친지들이 선물하기도 하고, 저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죠. 지금은 300개 정도 갖고 있습니다.

“시대의 무게 내려놓고 싶지만 시대의 소명은”

양 : 노 대통령께서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다음 대통령은 한명숙 총리 같은 부드러운 지도자가 되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신 걸 알고 계신가요?

한 :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가 쓴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노 대통령께선 국민통합을 자주 강조하셨어요. “내가 대통령 할 때는 아무래도 국민통합을 쉽사리 하지 못할 것 같다”는 걱정과 함께 “대화와 화해, 통합을 이루는 부드러운 리더십을 지닌 사람이 다음 대통령이 되면 좋겠다.”고 말하셨죠. 그러면서 제게 “큰 꿈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당부를 여러 차례 하셨어요. 지난 대선 때 후보 경선에 나가게 된 배경에는 노대통령의 이런 뜻이 한 요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양 : 여성운동가로서 업적을 남겼고, 국회의원, 장관, 최초의 여성총리까지 지내셨는데, 남은 소망이 뭔가요?

한 : 우선, 자연인으로 돌아가 자유인으로 살고 싶어요. 그리고 좋은 책을 쓰고 싶다는 학창 시절의 꿈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구요. 그동안 했던 일, 살아온 인생을 소재로 여러 장르의 글을 써보고도 싶습니다. 또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 곁에서 그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가고 싶기도 하구요. 제 자신이 가난한 삶을 오래 살아서 그들의 아픔을 너무나 잘 알고 있거든요. 요즘 양극화 심화로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 격차가 갈수록 벌어져 가슴이 더 아파요.

몇 가지 궁금한 게 더 있었는데, 어떤 재야 길거리 행사에 가야 할 시간이 됐다고 했습니다. 피 말리는 자신의 재판을 코앞에 두고도 힘을 보태야 할 자리엔 반드시 참석하는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같았습니다. 느긋하다고 해야 할지, 사서 고생하는 스타일이라고 해야 할지. 참, 그녀의 정치수사는 20일 오후 2시 재판에서 어느 정점을 맞는다고 합니다. 가봐야겠습니다.


※ 이 글은 <양정철닷컴>과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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