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관 경남지사 당선자 부인 채정자 씨 인터뷰 "임기 잘 마치고 나야 축하

2010. 6. 17. 19:42정치

"임기 잘 마치고 나야 축하"
김두관 경남지사 당선자 부인 채정자 씨 인터뷰

(노컷뉴스 / 손선경 / 2010-06-17)

 

선거 이 후, 어떻게 지냈나요?

=고향인 남해와 하동을 끝으로, 20개 시군을 돌아다니며 감사인사를 마쳤습니다. 그동안 신세진 분들이 너무 많았는데 절반은 갚은 것 같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선거를 많이 치르셨는데, 이전의 선거와 다른 느낌이 들던가요?

=이번에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지난 2002년 선거운동 시작을 마산에서 했는데 그 때 당시만 하더라도 냉담했습니다. 악수를 해도 인사를 해도 전혀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뒤에서 수군 거렸죠.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직접 다녀보니, 몇 년 사이 사람들 인식이 달라졌고 변화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이제는 바뀌어야지” “꼭 뽑아주겠다”며 손을 잡아주시는 시민들이 많아서 뭉클했습니다.

당선이 확정됐을 때 기분은 어땠나요?

=오히려 담담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많은 눈물을 흘릴 것이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담담해지더라고요. 책임감과 동시에 부담감이 느껴졌습니다. 많은 분들께 항상 죄송한 마음이 들었는데 이제 절반의 빚을 갚은 것 같았습니다.

낙선 경험이 적지 않았는데?

=몇 차례 낙선 했을 때에도 크게 실망하거나 동요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변에서 안타까워했죠. 남편에게도 항상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패한 것이 아니다. 작은 인생 공부를 했고, 부족한 부분은 채워가는 것이다. 더 준비 잘하라는 뜻으로 알고 감사하자” 그렇게 위로했고, 남편도 금방 툴툴 털고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남편에게 “수고했고 고생했다”는 말은 했지만, 축하를 해준 적은 없어요. 지금 축하는 해줄 수 없고 일을 잘 해냈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습니다.

아빠로서의 김두관, 그리고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나요?

=88년 고향인 고현면 이어리 이장이 됐을 때가 첫 아이를 출산하고 한 달 뒤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은 늘 바쁜 아빠를 보고 자라 왔죠. 아빠가 같이 못 있어주는 것에 대한 미안함도 컸지만, 아이들에게 “아빠는 사회적 대의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분이시고, 좋은 나라를 만들려고 노력하시는 분이다”고 가르쳤습니다. 자연스럽게 아빠를 인정하며, 잘 자라주어서 기특하죠.

아들(22)은 8월 제대를 앞두고 있는데, 스포츠 경영 쪽으로 목표가 뚜렷한 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바로 군대에 갔습니다. 대학에 가서 흥청망청 시간낭비하기 싫어 군대를 다녀온 후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보기로 했습니다. 제대하면 입시를 준비할지 해외 유학을 갈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면회를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고, 최근 선거운동기간에서야 대대장이 김두관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았답니다. 선거운동기간에 휴가 날짜가 잡혔는데 혹시나 다른 말이 돌지 않을까싶어 휴가도 연기해 6월 2일 당선이 확정된 후에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군대 가기 전에 아빠의 선거운동을 도울 기회가 있었는데 어느 날 아들이 할 얘기가 있다며 불러더군요. “이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다. 아빠는 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만, 엄마는 엄마의지와 상관없이 하는 일이 아니냐. 정말 감사하다.”며 큰 절을 올렸습니다.

딸(23)은 북경에 있습니다. 신문방송학과에서 광고를 전공하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1년 6개월 연수를 거친 후에 중국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여름방학 마다 한국에 오는데 작년 8월에 보고 아직 못봤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아들은 나를 닮고, 딸은 아빠를 닮았는데, 두 아이 모두 아빠의 기질과 성품을 많이 닮아서 긍정적이고 느긋합니다. 아들은 특히 사회성도 좋고 사람을 좋아하죠. 책보는 것도 좋아하고. 역사에 대한 관심도 많고요.

김두관은 어떤 남편인가요?

=지금까지 단 한번도 부부싸움을 해보거나, 고성이 오간 적이 없습니다. 시집와서 시할머니,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고부간의 갈등도 있었지만, 남편은 “언제든 참지 말고 이야기해라”라며 사소한 불만부터 어려움 다 들어줬습니다. “그게 그렇게 화나는 일인지 몰랐다”고 다독여줬습니다. 어른들께도 “내 자식도 아닌데 이만큼 하면 잘하는 거”라 했고, 야단치거나 나무란 적도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고비가 있었다면요?

=남해 군수 될 때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아이들은 크는데 벌어다 주는 돈은 없고, “빨갱이” “진보”라며 사람들은 손가락질 했습니다. 양품점, 식당 등 안 해본 일이 없었어요. 너무 힘들었습니다. 아이들과 산책을 하는데, 문득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것인가, 놔 버리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없으면 이 남자와 두 아이. 세 사람의 삶은 어떻게 될까? 그래 누군가 이런 삶을 또 짊어져야 한다면 그게 차라리 나라면 좋겠다. 내가 이 사람의 삶에 도움이 되고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남편과는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남편이 고3, 제가 고1때 만났습니다. 남편은 대학에 입학할 학비가 없어 부산에서 공무원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부산에 사는 제 이종사촌을 통해 만났습니다. 남편은 나를 중학교 때부터 봐왔다고 하니, 약 10년을 알고 지낸 후 결혼한 셈이죠.

연애할 때도 대놓고 솔직하게 얘기하더군요. “나랑 살면 힘든 삶을 살아야하는데 괜찮겠나, 편하게 좋은 생활 하려면 다른 사람과 결혼해야한다”고.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서도 친구들과 만나고 복귀 전 날에나 전화해서 “저녁에 잠깐 보자”고 했습니다. 일반적인 통보도 모자라 나가보면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 있었습니다. 그게 데이트였죠.

편지 한통으로 프로포즈를 대신했고, 결혼날짜도 자기 마음대로 정했습니다. 음력 1월 3일이 결혼기념일인데, 설 연휴에 고향 분들 다 모여 있을 때 해서 번거롭게 하지 말자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사람을 워낙 좋아해서 집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마땅한 공간이 없어, 신혼방이 모임 공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루 밤 사이에 김치한통 거들나기도 하는가하면 야참 만들다가 밤을 샌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남편 덕분에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다보니, 내성적인 성격에서 벗어났습니다. 비록 모아둔 돈 없어 반지 하나와 옷 한 벌을 가지고 결혼했지만,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일에 대한 원칙,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하는 소신 때문에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보이는게 다인 순박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선되고,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 가서는 왜 그렇게 우셨어요?

=옆에 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가장 컸습니다. 평소에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꿈을 자주 꿨습니다. 작년 서거하기 전, 초봄에도 꿈을 꿨는데, 평소 여사님과 항상 함께 등장해서 남해에 놀러오거나, 사저에 초대 해주시는데, 그날은 혼자 꿈에 나오셨습니다.

문득, 그 때의 음성이 기억에 났습니다. 이 모습을 함께 했으면 얼마나 칭찬을 해주셨을까? 그리웠습니다.

해냈다는 마음보다는 도민의 성원에 감사하는 마음, 열심히 하면 기회가 온다는 믿음, 우리의 승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채정자 씨 본인은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1남 2녀 가운데 장녀로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진학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간호 대학을 가거나, 미술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아버지 반대가 심했습니다. “여자는 안돼”라는 인식이 강했지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아쉽고 죄송한 마음에 많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누굴 원망하거나 제 삶에 대해 미련같은 것은 없습니다. 제 의지가 약했고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열정이 부족했지, 돈에 얽매이는 삶,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행복의 조건이라는 생각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삶이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고, 욕심을 버려야 비로소 보이고, 덜어내고 마음을 비워야 채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남편에게 바라는 점.

=크게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일을 잘 할 것이라고 믿지만, 지금처럼 사심 없이 원칙을 지키며 잘 해 내길 바랍니다. 칭찬은 못 받더라도 욕먹지 않는 정치인이길 바랍니다. 건강을 지키면서 개인적인 시간을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초심 그대로, 열린 도정을 이끌어 갔으면 합니다. 남해군수 시절에 대문을 아예 없애버렸죠. 누구든지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길 바랬던 겁니다. 지역 유지는 안 도와줘도 잘 살지만, 농사일에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누군가는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도와야합니다. 농사일 가기 전, 새벽 4~5시에 문을 두드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서민들에게는 공공기관이나 군청의 문턱이 높았던 거죠. 남편은 “오죽했으면 이 시간에 왔겠느냐”며 그들을 위하고 품위를 떠나서, 낮은 자세로 섬겨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래야 합니다.

도지사의 부인이 됐는데, 앞으로 어떻게 지낼 것인가?

=앞으로 관사에 살 생각을 하니 걱정됩니다. 감시받는다는 느낌도 들 것 같고, 그동안 사람들이 집에 많이 오고 갔지만, 한 번도 내 살림을 누구에게 맡긴 적도 없어 어색할 것 같습니다.

선거운동기간에 무료급식소를 3곳 정도 방문했었는데, 그 곳에 한 달에 한 번씩 봉사를 하러 갈 생각입니다. 남해에 있을 때에도 꾸준히 해 왔는데, 독거노인 목욕시키는 일, 반찬 나누는 일 등 ‘남을 꼭 도와야지’라는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 가족이 먹는 음식을 넉넉하게 한다는 생각으로 내가 언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인생의 저축이라는 생각으로 조금씩 차곡차곡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공부가 필요한 것도 같습니다. 기본 소양을 쌓는데 집중할 생각입니다.

원래 대우받거나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누리고 싶다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습니다. 책임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부담은 있을 수 있고, 언행을 조심해야하는 부분은 있겠지만, 내 생활에 변화는 전혀 없을 것입니다.

출처 :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503018

 

손성경 아나운서 / 노컷뉴스(경남C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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