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삼산리 할머니

2010. 2. 13. 14:33관심사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가족이신 삼산리 할머니의 생을 받아써볼라고 찾았다.

 

 

"여보세요.  할머니 저 울진에서 조사관님 하고 한 번 만나 뵜는데 기억하시겠어요?" 

"하모. 기억하니더.  언제 오니껴?"

"오늘 찾아가도 될까요?"

"오이소.  여 와서 전화하면 내가 다리께 나갈끼네."

"네. 삼산 어디예요?"

"삼산 1리니더.  와서 전화하이소."

 

대구 오가는 길에 삼산리 표지판을 본 듯해서 길을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내려갔다.  새 길이 나서 걱정이 좀 되긴 했지만 표지판은 있겠지 싶어서 그냥 내려갔는데 후포까지 가게 됐다.  아니다 싶어 다시 전화로 여기저기 물어보다 기성 방율리로 가서 산골짜기에서 헤메다 겨우겨우 삼산리를 찾았다.

 

 핸드폰도 안 터질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마을 어귀에서 핸드폰은 됐다.

"할머니, 저 삼산리 왔는데요."

"거가 어데니껴?"

"축사 보여요."

"거서 쭉 더 올라오이소.  내 다리께 나갈끼네."

"예"

 조금 더 올라가니 좀 더 많은 가구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나왔다.  이 동네지 싶은데 '다리'라고 할만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올라갔는데 임도다.  아까 거기지 싶어 다시 내려가니 난간없는 작은 돌다리가 하나 보이긴 보인다.  여긴가 하는데 건너편에서 할머니가 나오면서 "여기니더"하고 소리치셨다.

 

드디어 만났다.

 

할머니가 보자 마자 끌어안고서는

 

"아이고 고맙니더.  이렇게 다 찾아와주고."

"아뇨.  뭘.. 이거 김인데 반찬 없을때 밥하고 드세요."

"뭐 이런걸 들고 오노.  집에 영감 주지."

 영감?  시원씨가 영감됐다.

 

"자고 갈끼제?"

"아뇨.. 아뇨. 오늘 가야돼요."

"와?  오늘 자고 가라.  내 불도 많이 때워놨는데.  자고가라"

 전화로는 말을 높이셔서  만나면 어색할까봐 걱정했는데 보자마자 오랫만에 찾아온 손녀같이 대해주신다.

 

"아이고 고맙대이.  이래 찾아오고."

 

 오래되니 골목길을 돌아 들어가니 할머니 만큼 오래된 집이 보였다.  할머니 집이다.

 마루로 들어가니 집안에 부엌이 있다.  아주 깊은 흙바닥에 불을 때는 아궁이에 커다란 가마솥이 걸려 있는 진짜 옛날 부엌이다.  마루에서 부엌으로 내려가고 마루로 올라오기가 담장 넘어갔다 기어 올라오는 것 같다. 

 

"아이고 마루가 너무 높아요."

"그래. 그래 높제. 사는게 일타."

 

그러면서 사과 두알과 칼을 꺼내 오셔서 방으로 들어갔다.

바닥이 따뜻하다.  내가 온다고 불을 많이 땠단다.

 

"아이고 올겨울은 우째 그리 춥던동.  발이 시려서 내가 얼마전에 차 한트럭 샀잖아."

부엌에 나무가 한짐 쌓여 있던데 그 나무를 한 트럭 사셨다는 거다.

"추워서 나무 하시기 어렵지요?"

"아이고 이제는 못하제.  추워서 나갈수가 있나.  좀 참아볼라 했는데 우째 그리 춥던지 도저히 안 되겠어서 샀잖아.  저기 만날 주문해서 나무 사는 집에는 좋은 나무 주고 내는 쭉정이만 저래 갖다 줬다 아이라.  그래도 우짜노.  여까지 갖다준것만 해도 고맙제."

 그 귀한 나무를 나 때문에 오늘은 평소보다 훨씬 많이 땐 듯하다.  이래저래 민폐다.

 

그렇게 집을 둘러보고 앉으니 할머니가 위령제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래 이제 해마다 제사를 지내겠제?  12월 스무 여덟날."

"예 그럴 거예요.  그런데 이번처럼 크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래도..."

"내사마 이제 죽어도 한은 없다.  그저 그 연금만 그 놈한테 안 넘어가도록 그것만 해주모 된다.  내가 여 이장님한테도 말해났고 조사관님한테도 말해 놨는데 니도 알았제."

 이 이야기는 긴 이야기다.  나도 아직 자세히는 알지 못하는데 대충 조사관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 짐작하고 물었다.

"할머니, 따님은요?"

"우리 딸?  그 때 위령제 지내고 바로 올라갔제.  내 델고 갈라 하는데 내 안갔다.  자유가 중체. 자유안하면 만만치 않다. 만만치 않제."

 자유없으면 만만치 않다는 말을 자꾸 되뇌이셨다.  외롭겠지만 눈치밥 먹고 사시는 것보다 훨 낫다는 소리다.

"할머니 따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올해 환갑. 전쟁 터졌을때 나았으니까"

"어? 우리 엄마 하고 똑같네요."

"어무이가?  젋다.  얼마 안 됐네."

"예."

"고향은 어데고?"

"경남이에요.  부모님 합천에 사시는데 합천 아세요?"

"내 모르제."

"따님도 손자 보셨겠네."

"하모.  전에 밥해주러 내 안 갔나.  서울에.  아이고 내사마 별의별 고생을 다했다.  이사도 열두번은 더 다녔제.  윤씨네 문답 부쳐 먹을라고 윤씨네 따라서도 이사 갔고. 또 저 밑에 정자 있는데서 살때는 셋이서 사는데 내하고 우리딸 하고 그 양자델고 온 아들 하고 셋이서. 그 때는 아들도 쪼그맸제. 큰 소가 죽어뿌는기라. 내사마 무서워서 못살겠대.  우리밖에 없는데 소가 덜컥 죽어뿌고 송아지도 죽어뿌고 한께 무서워서 또 저기 사동으로 이사갔제.  그라고 식모살이도 많이 댕기꼬 아들 장가 보내고 나서는 그 밥해준다고 또 서울가서도 살고 그랬제.  내가 그 놈 두번이나 장가 보냈는데 온다간다 소식도 없네."

그러시더니 한숨을 푹 쉬시고는

"그게 벌써 60년이다."

하신다.

광복 60년, 뭔 60년 하면 아주 거창한 구호나 현수막에서나 보는 말이었는데 할머니한테 그 60년은 그대로 삶이었구나 싶다.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올해 아흔이신 외할머니 역시 '고생'하면 누구 뒤지지 않으시는데 외할머니 60년도 만만치 않았겠다.

"우리 외할머니도 올해 아흔이세요.  아직 건강하세요."

"아이고 그래?  어디 사시는데?"

"대구 근처에요."

"그라모 여는 어째 와서 사노?"

"아~ 여기 직장 발령 나서 왔다가 만나서 그냥 여기서 계속 살아요."

"그라모 연애했나?"

"예"

"시댁에 잘 해래이. 우리 딸한테도 내가 그칸다.  너거끼리 먹을때는 아끼더라도 시누 오고 하면 많이 퍼줘라.  그거 아끼봤자 잘 살도 못한다.  먹을꺼 인심 안 쓰면 내가 인심 잃는다.  시부모한테도 잘하고.  그래야제."

 

 할머니는 시집가서 딸 하나 놓고 전쟁 나고 그 전쟁통에 남편도 잃고 그 때부터 한많은 60년을 사셨다.  그리고도 대를 이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양자를 들이셨고 시댁의 '성'을 이어줘야 하기에 지극으로 그 아들을 키웠지만 결국 아들에게는 버림받았다.  그래도 나를 앉혀두고 몇 번이나 시댁에 잘해야됨을 말하셨고 영감 주라고 먹을 것을 싸주셨다.  그리고 그래도 아들은 있어야 된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난... 그냥 들을 뿐.

 

"내가 참 많이도 울었다.  아무도 모를끼다.  내가 얼매나 울었는지.  가슴이 답답하고 막 그라모 울면 좀 시원해지더라고.  밤에 그래 마이 울었지. 어휴."

 

또 한숨을 쉬신다.

 

그러다 감정이 북받쳤는지 쥐고 계시던 모자에 얼굴을 파묻고 아이고 하시면서 한스러운 울음을 터뜨리셨다.

 

"내가 송곳같은 이 맷돌같이 깨물고 살았는데... 살아보이 별거 아닌 것을... 살아보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송곳같은 이, 맷돌같이 물고 살았다니...

가슴을 탁 치는 말이었다.  살아보지 못한 우리가 절대로 쓸 수 없는 말이다.

 

"내가 내 딸한테도 그랬다.  내가 전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딱 일어나 잘 나가고 여기저기 돌아댕기고 싶고 그랬는데 요새는 일어나모 개운치가 않대이.  작년하고 영 달라.  느낌이 이상하대이.  멍한게.  내가 한물 갔지 싶더라고.  그래서 내 우리 어매처럼은 못 살지 싶다.  우리 어매가 여든 일곱까지 살았는데 내가 올해 여든인데 영 멍하다고.  작년에 위령제 지내고 딱 그렇네."

 

 위령제때 유일하게 하얀 한복을 입고 오셔서 엉엉 우시던 할머니다.  그동안 악착같이 살아왔던 한이 힘들게나마 풀리시면서 기력도 급하게 떨어지시는 것 같다.

 우리가 삼남매라니까 작다시며 자식은 많아야 된다 하신다.  할머니는 8남매셨는데 넷이 죽고 넷이 살아남아 살다가 한 분이 얼마전에 돌아가셨는데 지금은 당신이 가장 먼저 죽을 순서가 됐다하신다. 

 

그 사이 할머니는 밥을 해 놓으셨고 자고 못 가면 밥이라도 먹고 가야 된다 하시면서 밥을 차려 주셨다.  가마솥에 중탕을 한 계란찜과 고사리나물국, 김치 그리고 내 세끼 밥보다 더 많은 밥을 퍼오셨다.  들어오시면 같이 먹을라고 기다리니 얼른 먹어라 하신다.  점심도 먹고 왔는데 또 먹을라니 밥이 너무 많아 몰래 밥솥에 들어냈다.  할머니는 편하게 먹으라고 일부러 들어오시지도 않고 마당에 서 계셨다.  내가 와서 이래저래 폐가 많다.

 

 자고 가지는 못해도 좀 오래 앉았다가 가야겠다 했는데 밥을 다 먹고 나니 이제는 날 저문다고 빨리 가라하신다.  또 올게요 하니 정월보름 지나고 오라 하신다.  동네 할아버지들 제사도 있고 한데 다른 동네 여자가 드나들면 안 좋다고 보름 지나고 꼭 오라 하신다. 

 

 날 풀리면 감자도 줄테니까 또 꼭 오라 하고 찹쌀은 한 되 넘게 퍼 주셨다.

 

차가 돌아 나올때까지 할머니는 길가에 서 계셨다.

 

 

 

 

 

출처 : 한데가꿈
글쓴이 : 오늘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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