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화된 하나, 변질된 하나.

2009. 10. 20. 09:23정치

퇴화된 하나, 변질된 하나.
(서프라이즈 / 내과의사 / 2009-10-19)


이명박이 드디어 ‘부동산 알카에다 자폭테러 조직원’임을 커밍아웃했다. 어제 뉴스를 보니 세종시 계획을 원천 무효화시키려는 모양이다. 이명박에게는 그가 믿는다고 뇌까리는 기독교 신앙(상식을 가진 사람이 보기엔 그는 얼치기 사이비 예수쟁이에 지나지 않지만)보다 더욱 목숨 걸고 사수할 대상이 하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바로 부동산 투기 시장의 거품이다.

 

상위 1%의 기득권들에게 대도시는 사람으로 바글거릴수록 살기 좋아진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사람대비 면적이 좁아질수록 땅값은 사람값보다 기하급수적으로 비싸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의 인턴 시절. 40평짜리 방 하나에 인턴 30명이 2층 침대 15개를 놓고 숙식을 해결했다. 같은 병원에서 하룻밤에 몇 십만 원짜리 VIP 병실에 입원한 환자는 40평 공간을 혼자서 사용했다.

 

서울과 수도권이 지금보다 몇 배 사람으로 미어터져도 상위 1% ‘강부자들’은 쾌적한 주거공간을 보장받는다는 뜻이다. 땅값은 더더욱 올라가기 때문이다. 대신 사람값은 한없이 저렴해진다. 이렇게 가다간 3D 업종뿐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서민들은 외국 이주 노동자들과 일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여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예 의사도 수입하면 좋을 듯싶다…….^^)

 

서울과 수도권에 사람이 불나방처럼 묻지마 정신으로 맨땅에 헤딩하듯 모이는 이유는 그래도 서울과 수도권에 먹고살 만한 거리가 상대적으로 많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는 정부와 국가지도자라면 서울만 따져 국토의 0.5% 전후한 면적에 인구의 1/5가량이 몰려 사는 황당한 모순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풀려고 노력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렇게 하려면 일단 서울에 가지 않고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다는 믿음을 주는 정책이 수립되고 집행되는 게 당연하다.

 

노무현이 대선공약으로 제시했고, 이후 총선을 거쳐 여야 합의로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특별법이 통과된 이유는 지역 간 정치투쟁과 탄핵정국이라는 변수가 작용한 까닭이 크지만, 수도권 집중화의 가속이 모두에게 결코 득이 될 수 없다는 정책 주체와 국민정서의 교감이 뒷받침된 상황도 만만찮게 작용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국민정서는 수도권 주민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헌재가 들고 나온 ‘관습헌법’이라는 해괴한 논리는 사람들의 이성을 한 방에 마비시켰다. 그 이면에는 수도권 공동화 = 집값 폭락이라는 공식이 먹혀들어갔다. 코난 도일이 신문 익명 광고란에 “모든 것이 탄로 났소. 당신, 어서 몸을 피하시오!’라는 광고를 내자 갑자기 수많은 런던 시민이 잠수를 탔다는 일화가 있다. 마찬가지이다. 행정수도 옮기면 집값 떨어진다는 협박에 심지어 코딱지 만한 집도 없는 인간들도 관습헌법 논리에 찬성을 했거나 묵시적 동의를 던졌다. 그래야 나도 천민이라고 무시 받지 않거든.

 

한국 사회의 대표적 기득권 족속인 내가 초지일관 반 이명박, 반 한나라당 정치노선을 고수하는 이유는 내가 정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은 절대로 아니다. (나로 말하자면 한국 사회의 평균적 속물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의식과 정서가 무너지는 순간, 가장 먼저 파멸하는 대상이 바로 나 같은 족속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과 한나라당, 그리고 조중동은 공동체 의식을 붕괴시키는 삼위일체 공공의 적이다.”라는 신앙에 버금가는 신념으로 나는 서프에 글질을 한다.

 

노무현의 지역 균등 발전 전략은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이권투쟁을 촉발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계획대로 추진되었다면, 지역 균등 발전 전략 최대의 수혜자는 다름 아닌 수도권 주민들이었을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물론 수도권에서 곡소리 내는 인간들도 없지는 않았으리라. 다름 아닌 이명박이 견마지로를 다하여 충성을 바치는 ‘강부자 1% 귀족’들 말이다. 하지만, 개혁세력의 가장 무서운 적은 이들 1% 귀족들이 아니었다. 귀족 근처에도 못 가는 주제에 귀족인 척 하면서 귀족 편을 드는 등신들이 문제였지.

 

이명박의 세종시 무효화 정책을 이유로 나는 이명박을 ‘부동산 알카에다 자폭테러 조직원’이라고 단정했다. 아마도 세종시 무효화는 한나라당, 수구 언론과 길들여진 관제언론, 부동산에 이해관계가 사무친 기득권층, 그리고 귀족도 아닌 주제에 귀족인 척 행세하는 등신들의 환호 속에 무대포식으로 진행될 것이고, 이는 국민 모두에게 수도권 부동산 올인 지령으로 인식될 것이다.

 

부동산 거품의 한없는 팽창……. 만약 필연적 물리법칙에 따라 거품이 터진다면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파멸할 것이 명약관화하다. 그리고 부동산 불패론자들의 주문처럼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거품이 4차원 수준으로 팽창한다면 역시 대한민국은 파멸할 것이다. 왜? 1% 부동산 귀족이 나라의 부를 송두리째 쓸어담는 상황에서 과연 사회구성원을 하나로 묶어주는 최소한의 공동체 의식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명박이 ‘부동산 알카에다 자폭테러 조직원’이라 불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는 그가 견마지로를 다하는 1% 강부자의 이익 수호를 위해 대한민국을 경제적, 혹은 공동체 수준에서 근본적으로 파멸시켜 자신뿐 아닌 기득권자들의 알량한 이익마저 날려버리려는 자폭 테러를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가 막힐 노릇은 이러한 자폭테러가 모두의 환호성 속에 태연자약하게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황금알 대량 노획을 위해 거위의 배를 가르는 어리석음이 대한민국 사회에 기본 상식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정말 이명박 만세라고 아니할 수 없다…….

 

전쟁터에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이유는 둘 중 하나라고 한다. 하나는 적군에 대한 증오심이요, 또 하나는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비정한 전쟁 원칙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에 맞서 일어섰던 시민들의 저항 또한 나는 전쟁터의 군인이 지니는 이 두 가지 속성의 연장선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불의에 대한 분노, 그리고 나의 소박한 삶을 짓밟는 추악한 권력을 막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절실한 위기의식이다.

 

이것은 노무현과 김대중이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걸었던 시민 최후의 보루이기도 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명제이지만, 나는 이명박의 거침없는 무한 독주에서 최후의 보루를 일그러뜨리는 균열을 발견한다.

 

불의나 불합리에 대한 증오는 위축되어 퇴화되었다. 전과 14범 대통령에 논문표절 탈세 국무총리가 감투를 쓰고서 법치주의를 읊조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김연아 덕에 대한민국 만세라며 무던히 삶을 이어나간다. (김연아 욕하자는 거는 아니다.) 이명박이 ‘부자감세’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게 털어가는 100만 원에는 눈길도 주지 않으면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저렴한 인생끼리는 100원 동전 하나라도 빼앗기지 않으려 악다구니를 쓴다. 부정의에 대한 증오의 몸짓은 이제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멍청한 짓거리로 비아냥의 대상이 될 뿐이다.

 

더더욱 내가 전율하는 것은 죽이지 않는다면 내가 죽는다는 원칙의 변질이다. 나를 죽이려 덤비는 적에 맞서는 방법도 두 가지이다. 하나는 목숨을 건 진검승부이고, 또 하나는 무조건 항복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님은 먼 곳에’를 보면 미군에게 베트콩으로 오인 받은 한국 연예인들이 살기 위해 ‘대니 보이’ 팝송을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니들 노래 아니까 난 니들과 같은 편이다. 죽이지 마라는 생존을 위한 절규의 몸부림이 인상 깊었던 장면.

 

이명박은 1% 강부자 귀족의 탐욕을 위해 99% 국민을 제물로 바치겠다고 덤빈다. 탐욕에 영혼을 팔아먹은 저들에게선 조폭의 살기마저 감돈다. 그렇다면,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가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맞서 싸우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나를 죽이겠다고 겁박하는 저들에게 사람들은 스스로 무장해제 선언을 한다. 그리고 나도 알고 보면 1% 강부자 귀족과 같은 종자들이라고 간증의 지랄을 떤다.

 

연예인들이 양키도 아닌 주제에 양키 흉내 내며 ‘대니보이’를 복창한 것은 그래도 전쟁터에서 미군이 우방이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가진 놈인 척 행세하며 자신들 주머니 털어먹자는 놈들과 배꼽 맞추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모습은 그저 무식의 소치려니 가엽게 봐주려고 해도 그런 종자 때문에 온 가족이 망가지는 꼴을 보자면 정말 아구창이라도 한 대 날려주고 싶은 심정뿐이다.

 

전쟁에서 진다는 것은 내가 죽는다는 의미, 혹은 내가 포로가 된다는 의미이다. 역사의 대부분 기간동안 전쟁포로는 노예의 가장 중요한 공급원이었다. 나의 소박한 삶을 짓밟으려는 추악한 권력에 직면하여 죽이지 않는다면 죽는다는 원칙의 변질, 스스로를 추악한 권력과 동일시하여 그들의 이익에 무임승차하려는 기회주의는 결국 스스로를 전쟁포로라는, 노예라는 운명에 방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선택이다.

 

담배를 많이 피우면 비타민 C가 파괴된다는 보도를 듣고 골초 친구 녀석 하나는 ‘ 아, 그럼 레*나 C를 많이 먹어야 되겠네.’라는 반응을 보였다. 죽어도 금연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국감장에서 전경들만 미국산 소고기 먹였다는 보도를 보면서 사람들은 마찬가지 반응을 보인다. “음, 내 자식새끼는 절대로 군대 보내면 안 되겠네.” 죽어도 미국산 쇠고기는 안전하니까 자기들 먼저 열심히 처먹겠다는 약속을 개무시한 정권을 때려잡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시민 최후의 보루. 하나는 퇴화되었고, 하나는 노예심리로 변질되었다.

 

(cL) 내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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