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하일기15] 대통령의 열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2008. 8. 15. 12:58사람 사는 세상

한여름 봉하마을 이색풍경

전국적으로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 9일 봉하마을은 이른 아침부터 시끌벅적했습니다. 새벽부터 산비탈 장군차밭에서 제초작업을 하던 김호문씨(친환경 생태마을 만들기에 앞장서고 있는 전통테마마을추진위원장)가 말벌에 쏘여 병원에 실려 가고, 119구조대가 출동해 때 아닌 말벌집 퇴치작업이 벌어졌습니다. 김정호 전 비서관 등 봉하마을의 자칭 ‘들판팀’은 생태연못 주변 제초작업에 투입돼 화(?)를 면했습니다.

봉하마을의 여름은 무척 따갑습니다. 이글거리는 햇볕을 피해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은 그늘을 향합니다. 이날, 그것도 가장 무더운 오후 2시. 대통령 사저 앞에선 이색적인 풍경이 연출됐습니다.

대통령은 모자만 쓴 채 뜨거운 햇살 아래 서있습니다. 때로는 목소리를 높이며 한 시간 가까이 말을 이어갑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방문객들이 웃기도 하고 박수도 치면서 그 앞에서 연신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냅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강사도 청중도 보통 지극정성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말대로 돈 받고 하는 일이 아니라서, 누가 강요한 게 아니라서 가능한 상황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방문객들이 재임시절을 회고할 때 가장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뭐냐며 소회를 묻습니다. 대통령은 아쉬움이 많다며, 복지정책과 관련해 분배대통령이라는 공격을 많이 받았는데 실제로 분배대통령을 확실히 해볼 수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며, 딴에는 한다고 했는데 충분치 못했고 많이 부족했다고 심경을 밝힙니다. 이어 부동산정책과 교육정책에 대한 여러 소회를 밝혔습니다.

국회가 걱정이라는 질문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논란과 관련해 가축전염병예방법을 고쳐서 입법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예로 들며 국회의 역할이 중요함에 공감을 표했습니다. 오후 2시 방문객과의 만남에서는 음식이야기로부터 시작돼 균형발전, 부동산, 교육, 경제, 남북관계까지 많은 이슈들에 대한 대통령의 ‘즉석 강연’이 이루어졌습니다.

매일 서너 차례 ‘뙤약볕 강연’을 하는 이유

대통령이 귀향한 후 많은 사람들이 봉하마을을 찾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방문객들이 줄어들지 않겠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6개월도 안돼 방문객이 55만명을 넘어섰고, 좀처럼 줄어들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한여름 휴가철인 요즘도 평일 2천명, 주말엔 2천5백명 안팎의 방문객이 몰리고 있습니다.

“20대 못지않은 열정이 살아있으신 것 같다.” 한 방문객의 말처럼 더 예상치 못했던 건 대통령의 ‘열정’이었습니다. 참여정부에서 일하며 5년 내내 때로는 감탄하고, 때로는 버거웠던 터라 대통령의 열정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민주주의 학교’를 열고 강연하는 현장을 보고는 또 다시 감탄했습니다. 한편으론 대통령 옆에 서있기만 했는데도 웃옷이 흠뻑 젖었는지라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닌지 걱정도 많이 됐습니다.

대통령은 8월부터 매일 오전 11와 오후 4시, 6시 세 차례에 걸쳐 한 번에 적게는 200~300명, 많게는 400~500명의 방문객을 대상으로 40~50분 안팎의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9일처럼 예정에 없던 인사까지 하게 되면 하루 네 차례 이상의 ‘뙤약볕 강연’을 소화해야 됩니다. 이날 오후 2시 인사는 적잖은 방문객들이 너무 오래 기다릴 것 같다는 보고에 대통령이 “내가 한 번 더 하지” 하고 나서시면서 생긴 일정입니다. 어떤 이유든 너무 강행군을 하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대통령께 ‘강연’을 하시는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방문객들에게) 봉하마을 자연생태계 얘기를 하다보면, 오늘의 팍팍한 현실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메시지를 듣고 싶어 하는 질문들이 많이 나옵니다. 찾아온 손님들이 무엇을 바라나 따라 보다보니 그런 주제로 갔습니다. 대체로 알고 싶어 하는 현안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바닥에 깔린 원론이라도 설명하려고 합니다.”

대통령은 “사람들이 주요 내용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런 문제의식이 자연스럽게 자기학습의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엔 “물론 상당히 고달프다”면서도 “손님들이 애써 왔는데 얼굴만 삐쭉 보일 수는 없지 않나. 아이들을 데리고 몇 시간씩 걸려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대통령은 그것을 아무리 힘들어도 해야 하는 사람간의 관계와 도리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극복할 수 있는 난관과 진짜 문제

오후 4시. 앞줄에 선 어린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떠들자 대통령의 장난기가 발동했습니다. “자네, 대통령이 뭔 줄 아나.” “이놈들아, 조용히 좀 해라. 할아버지 얘기 좀 하자.” 방문객들 사이에서 웃음꽃이 터집니다.

방문객들이“경제가 어렵다”고 하자 대통령은 “앞으로 좋아질 것”이라며 위로합니다. 국가경제의 시스템이 붕괴된 1998년에도 국민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었지만 단합해서 위기를 극복했고, 2003년에도 신용불량자 문제로 상당히 어려웠지만 잘 넘겼다며, 이전의 위기들을 우리가 잘 넘겨왔다는 점을 상기시켰습니다.

국제투기자본의 농간으로 인한 기름값, 원자재값 널뛰기가 주요 원인인 이번 어려움은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의 심각성이 덜하며, 참여정부 때도 국제유가가 3배 정도 올랐지만 잘 견디어왔던 점 등을 들어 극복할 수 있는 난관이라고 진단합니다. 다만, 정부가 빠른 성장을 보여주려고 무리하게 ‘각성제’나 ‘흥분제’를 쓰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대통령은 진짜 문제는 양극화라고 지적했습니다. 분배와 고용과 성장이 선순환 되는 새로운 국가전략의 필요성, 작은 정부 주장의 허구, ‘양극화 교육’에 대한 우려도 설명합니다. 오후 4시 ‘강연’은 제주도 어린이집에서 온 아이들과 방학을 맞아 부모님과 함께 온 학생들을 위한 눈높이 조언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지금 해야 하는 작은 일을 잘 해야 한다.” “앞으로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시험만 잘 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을 찾아서 할 줄 아는 사람이 성공하는 시대로 간다. 학원은 시키는 일만 잘 하는 사람을 만든다. 학교생활을 잘 해야 한다.”

“감사원이 아니라 공정위가 힘쓰는 세상돼야”

오후 6시. 한낮의 무더위는 한풀 꺾였지만 아직도 햇살이 따갑습니다. 대통령은 봉하마을을 생태마을로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얘기합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나 다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와서 보고 괜찮다고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생태환경을 최대한 복원시키고 싶다고요.


대통령은 물가와 경제, 양극화 문제와 관련해선 지속성장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환경과 안전, 노동과 인권, 공정거래 등에 관한 규제가 없다면 시장은 강자의 횡포를 막을 수 없고 약자들을 보호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안타까운 듯 “참여정부에선 공정거래위원회가 힘깨나 썼는데, 요새는 감사원이 힘을 쓰고 있는 것 같다”“감사원이 아니라 공정거래위원회가 힘을 쓰는 세상이 훨씬 국민들에게 유리한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이어 논란이 되고 있는 감사원의 행태와 관련해선 “감사원이 권력기관으로 등장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감사원이 나와서 언론의 군기를 잡는 시대쯤 되면 그것은 퇴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오후 6시 ‘강연’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한 것은 요즘 뜨거운 쟁점인 KBS 문제였습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해 가급적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고 있는 대통령이지만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정연주 사장이 배임을 했다는데, 배임을 했다고 가정하면 부당하게 이득을 본 사람은 국민입니다. 왜냐 하면 상대가 정부니까요. KBS와 정부간 소송에서 합의를 해서 KBS가 손해를 봤다면 덕을 본 건 정부죠. 정부가 덕을 봤으니까 그것은 국민에게 이익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정부가 덕을 보고, 국민이 덕을 봤는데 정부에서 그걸 문제 삼고 있습니다. 참 해괴한 논리입니다. 거기서 감사원이 총대를 메고 나섰습니다. 역사는 그런 것 같습니다,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국민들이 눈 감고 있으면 계속 뒤로 갈 수도 있습니다.”

봉화산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

10일 오전 6시. 대통령 내외와 전날 서울에서 온 백종천 전 안보실장, 성경륭 전 정책실장, 문정인 전 동북아시대위원장, 이재정 전 통일부장관 등 20여명이 사저 앞에서부터 봉화산 등산길에 올랐습니다. 대통령이 앞서 가며 조선시대 봉화제도부터 시작해 봉화산과 봉하마을을 둘러싼 갖가지 사연과 역사를 맛깔스럽게 설명합니다. 더 해박한 ‘봉하마을 가이드’를 찾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40분만에 정상에 오르니 오른쪽으로 진영읍에서부터 왼쪽으론 화포천까지 봉하마을을 둘러싼 풍광이 드넓게 펼쳐집니다. 짙푸름을 더해가는 들녘에 놓인 20여개의 노란 오리집도 한눈에 들어옵니다. 대통령은 자주 오르면서도 항상 봉화산 정상에 서면 감회가 남다른 모양입니다. “생태숲, 생태농장, 생태습지… 사람들을 풍요롭게 해주고 기쁘게 해주는 자연을 만들고 싶습니다.” 대통령이 생각하는 봉하마을의 비전입니다.

“봉화산은 학산이라고도 하는데, 맞은편 산은 뱀처럼 생겼다고 뱀산이라고 합니다. 그 사이에 개구리처럼 생긴 개구리산이 있습니다. 보이시죠. 흡사 뱀이 개구리를 노리고 있지만 학 때문에 못 잡아먹고 있는 형세입니다. 나는 약자인 개구리를 지키는 파수꾼 학이 좋습니다.”

이번에 알게 된 대통령이 봉화산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정상 바로 아래 사찰 정토원에서 아침 공양을 했습니다. 산내음 가득한 나물들과 묵은지, 호박잎국이 일품입니다.

갈대숲인 자은골을 돌아내려오는 하산길에선 대통령이 앞서 가며 발로 갈대 밑동을 밟아서 뒷사람들이 걷기 편하게 만들어줍니다. 물억새와 산억새의 차이를 설명하던 대통령은 뒤를 돌아보며 갈대숲을 그대로 두는 게 좋을지, 갈대가 없는 곳은 야생화단지를 만드는 게 좋을지, 의견을 묻습니다. 봉하마을을 어떻게 하면 친환경적으로 바꿀 것인가에 대한 아이디어가 오가는 사이에 어느덧 마을 저수지가 나오고 사저가 보입니다.

보수의 거짓말과 진보의 가치

오전 11시. 대통령이 사저 앞에 모습을 나타내자 박수와 함성이 쏟아집니다. 많은 방문객의 손에 대통령의 사진을 찍기 위해 휴대폰과 카메라가 들려있습니다. 대통령은 봉하마을에 산수유와 개나리를 많이 심으려 한다며, 앞으로 볼거리와 할거리가 풍성한 1년 뒤, 2년 뒤, 그리고 5년 뒤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친환경, 유기농에 대한 꿈을 펼칩니다.

그러면서 화두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아이들에게 밝은 미래를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인가로 넘어갔습니다.

“성장만 하면 분배는 절로 된다, 이건 80년대까지의 논리고 상당 부분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달라졌는데도 옛날 노래를 계속 부르고 있습니다. 세금 깎아주면 경제가 성장한다, 작은 정부해야 경제가 성장한다, 이건 보수의 논리로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민영화하면 경제가 활성화된다, 이건 절반은 맞고 절반은 거짓말입니다. 깊이 따져봐야 합니다. 민영화하면 공공요금도 내리고 효율성도 올라간다, 이건 아닙니다. 센 놈만 밀어주라, 이건 그들끼리의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인데 결코 좋은 세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보수의 금과옥조입니다.”

대통령은 보수언론과 보수진영에서 시도 때도 없이 ‘친북’ ‘좌파’ ‘빨갱이’로 매도하는 진보의 개념을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왕과 귀족이 누리던 권리를 모든 국민이 함께 누리는 사회로 가는 것, 인간의 권리가 확대되어 나가는 게 역사의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와 평등이 꽃피는 사회를 만드는 것, 그게 진보입니다. 진보의 철학은 연대입니다. 가난한 사람끼리 의지하고, 또 힘 있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끼리도 의지하고, 서울 사람과 지방 사람이 의지하는, 그래서 모든 사람이 의지하고 협력하는 사회가 진보의 가치입니다.”

국민들이 보수의 거짓말을 낱낱이 알아야, 자기의 이익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진보한다고 강조하면서 대통령은 ‘즉석 강연’의 마지막을 당부로 끝냅니다.

“보수도 아니면서, 기득권도 없으면서 보수의 노래를 따라 불러서는 안 됩니다. 나한테 손해가 되더라도 나라가 잘 된다면 따라 불러야죠.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나라가 잘 되기 어렵습니다.”


이번에 봉하마을을 다녀오면서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 시민들과 함께 국가의 먼 미래와 장기적인 비전을 찾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하신 듯하다”는 김경수 비서관의 말처럼 대통령은 봉하마을 방문객들과 함께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진보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소통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강물은 갈짓자로, 어떤 때는 거꾸로도 흐르지만 결국 바다로 가듯, 민주주의도 진보하다가 퇴보하기도 하지만 길게 보면 반드시 진보를 향해 나아간다는 믿음이 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아이들이 사회에 나설 20년 후를 생각하는 국민의식이 필요하고, 적어도 20년 뒤를 내다보는 성장전략이 필요하다는 당부를 잊지 않습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 대한 대통령의 강한 믿음입니다.

“국민들은 점점 더 깨어가고 있고, 점점 더 속일 수 없습니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국민들이 바라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이고, 공정하게 경쟁하고, 또 그 경쟁의 결과 낙오하는 사람들까지도 더불어서 함께 가는 사회이기 때문에 못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사회가 와야 하고, 반드시 올 겁니다.”

촛불시위도, 뜬금없는 것 같은 민간독재 논쟁도 결국 우리가 그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한여름 봉하마을의 풍경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