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하일기14] 대통령의 여름휴가

2008. 8. 15. 12:57사람 사는 세상

1.

7월 21일 오후 평창군 도암면 병내리, 한국자생식물원 입구.
일행과 함께 스타렉스 승합차를 내린 대통령은, 어쩌면 하차 지점 바로 위로 높이 걸린 큼지막한 환영 현수막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식물원의 전경이나 주변의 풍광을 둘러볼 여유는 더더욱 없었을 것입니다. 대통령의 출현을 학수고대하던 적지 않은 숫자의 관람객들 때문입니다.

식물원장을 비롯한 관계자들과의 수인사가 끝나자마자 대통령은 서둘러 관람객들과 악수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즐거운 소란이 시작됩니다. 와글와글, 수군수군. 왁자지껄. 명랑경쾌한 소리의 울림을 타고 해맑은 웃음들이 넘실댑니다. 관람을 마쳐 이제 식물원을 떠나야 할 사람들을 위해 대통령은 기꺼이 사진 모델이 되어 줍니다. 태풍 갈매기의 뒤끝인지 가랑비가 추적추적 어깨를 적십니다. 빗방울이 떨어진 곳으로부터 강원도의 흙냄새가 잔잔히 퍼져갑니다. 그 흙 내음 속에서 또 하나의 익숙한 냄새가 느껴집니다. '사람 사는 세상'을 살아가는 정겨운 사람들의 내음입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첫 여름휴가는 이렇게 흙냄새, 사람냄새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재임시절 대통령은 유난히도 여름휴가와 인연이 없었습니다. 심각한 사안들은 마치 기다리고 있기나 했던 것처럼 휴가철만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3년 전 여름 모처럼 대통령이 이곳 강원도 평창을 찾았을 때에는 때 아닌 국정원 도청사건이 편안한 휴식에 심술을 부렸습니다. 사실 저 산간벽지 외딴 마을의 작은 사건도, 지구 반대편 나라의 갑작스런 정변도,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 대통령의 직무와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는 만큼, 대통령의 어떤 휴가가 편안하기만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연목구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대통령의 건강한 재충전을 위해서 휴가만큼은 심각한 사안들이 없기를 참모들은 바랐지만 그 기대는 번번이 빗나가기 일쑤였습니다.

결코 한갓질 수는 없었던 대통령의 휴가. 거기에는 이런 대통령 문화도 한몫을 하고 있었지만, 한 가지 더 결정적인 원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대통령 자신입니다. 언제 어디에 가서든 국정과 일에 대한 긴장의 고삐를 놓치지 않으려 했던 대통령 특유의 집념입니다.

"5년 내내 염불을 외었었는데, 제도가 잘 안 바뀌더군요."
여장을 푼 용평의 숙소에서 만난 이곳의 군수에게 대통령은 오랜 관심사를 꺼냅니다. 2년 전 있었던 강원도의 큰 수해와 복구 지원 문제로 시작된 대화. 그 끝에서 대통령은 "집이 떠내려간 사람은 무조건 국가가 집을 지어줘야 한다." "국가가 최고의 보험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합니다. 5년 내내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아니 일이 없는 평소에도 국무회의 석상이나 참모회의에서 일관되게 주장하고 제안했던 사안입니다. 그것이 끝내 제도화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의 표현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담당자들이 나서서 고민해주기를 바라는 희망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회고'나 '관조'가 미덕일 수도 있는 '전직'의 신분이지만, 대통령의 관심은 바람직한 정책과 대안의 모색에 더욱 더 집중되고 있는 듯합니다. 사과주스 한 잔을 놓고 오가는 대화가 길어지면서 화제는 '지방공무원의 역할'에서 '사회적 일자리'로, 다시 '국토 가꾸기'로 넘어갑니다. 대통령의 탄식이 이어집니다.

"시골에 가 있어보니, 정말 절실합니다. 기찻길 옆 풀을 베어내니 기차에서 버린 기저귀들이 얼마나 수북이 쌓여있는지...."

2.

'농촌마을 가꾸기'
이번 여름휴가의 컨셉입니다. 지난 5개월 동안 봉하마을 생활에서 보고 느낀 경험을 토대로 대통령은 다시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는 듯합니다. 대통령 자신이 마을에 안착하는 단계를 넘어 이제 적극적으로 마을의 경쟁력을 키우며 미래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번 휴가도 앞선 경쟁력을 갖춘 농촌의 노하우를 배우려는 벤치마킹의 일환인 셈입니다. 휴가지로 강원도를 선택하셨다고 들었을 때 상황도 상황인 만큼 이번에는 외부와 차단된 온전한 휴식을 취하실 것으로 예단했던 저의 추측은 그야말로 100% 빗나간 오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농촌과 자연은 이미 오래 전부터 대통령의 이야기 속에서 빠지지 않는 한 대목이었습니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또 재임시절에도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향의 풍광과 그곳에서 살던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의 이야기를 회상하곤 했습니다. 때로는 투박한 사투리에 조금은 낯선 토속적인 속담을 섞어가며 봉하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때면, 도시에서 자란 저 같은 참모들조차도 왠지 모르게 농촌에 대한 향수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청와대 경내를 산책할 때에도 대통령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를 예사로 지나치는 법이 없었습니다. 때로는 그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며 되뇌곤 했습니다. 어쩌면 자연에 대한 그렇게 남다른 애정과 관심이 결국은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열정과 갈망의 큰 원동력이 된 것이 아니었을까요?

"여보, 도라지꽃의 꽃말이 '영원한 사랑'이에요."
자생식물원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중, 대통령이 앞서 가는 여사님에게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을 건넵니다. 선뜻 대답을 하지 않던 여사님이 빙그레 웃고 맙니다. 여러 사람들 앞이라 대답이 쉽지 않았겠지요. 멋쩍어진 대통령도 빙그레 따라 웃습니다. 각양각색의 식물들이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다가 대통령의 발목을 잡습니다. 은은한 파스텔 빛을 발산하며 흐드러지게 피어난 산수국의 향연은 대통령의 큰 탄성을 자아낼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벌개미취, 노루오줌, 황기, 삼지구엽초. 저에게는 그냥 이름 모를 식물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대통령 앞에서는 그 이름이 하나씩 불리면서 단순한 '하나의 몸짓'으로부터 '꽃'으로, 또 '약초'로 완성됩니다. 해박한 지식도 지식이지만, 그 하나하나를 소중히 기억하는 배려가 남다릅니다. 식물원장이 마라톤을 100회 이상 완주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 넣은 기념탑 앞에서 '노간주'라는 이름의 나무를 기념으로 식수해줄 것을 청하자 그 나무의 특징을 잘 아는 대통령이 작은 걱정을 토로합니다.
"이거, 지독하게 안 크는 나무인데..."
그 지적의 의미를 이해했다는 듯이 식물원장이 웃으며 답합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주 오래 사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선택했습니다."

농촌과 자연을 알기에 그만큼 두려움도 주저함도 없습니다. '곤드레나물'이 유명한 산채으뜸마을에서는 이장님의 권유로 오얏나무의 열매를 따서 서슴없이 깨물어 봅니다. "꼭 자두 같은데..." 대통령의 시식 평은 정확했습니다. 나중에 검색을 해보니 '오얏나무'가 바로 '자두나무'라는 것입니다.

바람마을 의야지에서 대통령은 명장면을 연출했습니다. 풀 썰매 사건입니다. 아무도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습니다. 모두들 깜짝 놀란 만큼 한바탕 큰 웃음이 벌판을 가득 메웠습니다. 누가 권했던 것도 아닌데, 대통령은 마을 사람들과의 단체사진 촬영이 끝나자마자 안내를 따라 언덕을 오르면서 미리 풀 썰매 하나를 움켜쥐었던 것입니다. 정말 타보고 싶은 마음이 빚어낸 우발적 사건이었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한 몸 던져서 이렇게 열심히 미래에 도전하는 마을주민들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했던 고의적 사건이었을까요?

아무튼 대통령의 시도는 마지막 순간에 한 바퀴 굴러 넘어지는 것으로 의도하지 않았던 작품이 되었습니다. 옷을 추스린 대통령이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합니다. "요령이 생기면 끝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면 대통령은 더 멀리 가기 위해 노력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열정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일주일의 휴가가 중반을 넘어설 무렵의 어느 오찬자리. 대통령은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농촌마을을 둘러본 소감을 이렇게 중간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역시 사람입니다."



3.

'엄마, 엄마! 대통령 왔다."(바람마을 의야지의 어느 어린이)
"아니, 어디 이런 델 다 오셨어?"(산채으뜸마을 전통가옥의 주인할머니)
"어라, 노무현 대통령 아니신가?'(정선, 만찬장 가는 길의 대통령과 우연히 마주친 중년남자)
"와, 진짜 노무현 대통령이네."(그 만찬장 앞에서 기다리던 아가씨들)

대통령에게 자연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바로 그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휴가중인 대통령의 모습과 마주치자 각양각색의 표현으로 반가움을 전했습니다. 일정이 예정된 곳이나, 갑작스레 모습을 보인 길거리에서나 반가움의 반응들은 한결같았습니다. 핸드폰 카메라를 높이 드는 사람, 대통령의 출현 소식을 친구에게 전하러 뛰어가는 사람, 사인받을 종이와 펜을 찾으러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 어떤 작은 마을에서는 주민 전부가 나와 대통령을 맞았습니다. 무더운 뙤약볕의 강릉 선교장에서도, 굵은 빗줄기가 하염없이 내리는 영월의 청령포에서도, 사람들은 퇴임한 대통령의 친구 같은 출현에 환호와 박수를 보냈습니다. 스스럼없이 대중 앞에 설 수 있는 대통령의 소탈한 당당함, 그리고 이제는 전직 대통령을 거리낌 없이 이웃처럼 대할 수 있는 사람들의 여유가 빚어낸 아름다운 장면들입니다.

대통령은 사람들의 무리를 우회하는 일도 없고, 내미는 손길을 거절하는 법도 모릅니다. 그럴수록 경호팀의 긴장은 두 배 이상 늘어나기 마련입니다. 때로는 비서들이 지나치다 싶어 만류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대통령이 비서들을 설득합니다. 어린이들에게는 더욱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작은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구경 잘 했어?"(자생식물원에서 어린이 관람객에게)
"그래, 이리 와서 손 한번 잡아봐라."(청령포에서 대통령앞에서 수줍어하는 어린이에게)
"나중에 이 사진 보면서 나보고 아빠라고 하지 마라. 하하."(자생식물원 관람 도중 엄마와 두 어린이만 온 가족과 사진을 찍으며)

정선에서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음식점을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대통령은 기꺼이 밤의 사진모델이 됩니다. 사진이란 찍고 또 찍어도 아쉬움이 남는 법. 그리고 '대통령님, 한 장만 더요.' 하는 청을 끝내 거절하지 못하는 대통령. 이번 휴가 중에는 대통령이 먼저 나서서 사진을 더 찍자고 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바람마을 의야지에서 내외분이 마을 주민 전체와 단체사진 컷을 찍고 난 후의 일. 대통령은 졸업단체사진 같은 구도가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아 미안한 마음이었나 봅니다. "이러면 나중에 사진을 볼 때 제대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으니까, 부녀회, 청년회 등 대여섯 그룹으로 나누어 다시 찍읍시다."고 급제안.

문득 3년 전 5월, 직원들의 부모를 청와대 녹지원에 초청해서 위로행사를 할 당시 대통령의 언급이 떠올랐습니다.
"저와 사진을 찍으면 뒤에 그 사진을 보면서 기분이 좋으셔야 할텐데, 걱정입니다. 어쨌든 10년 뒤에 봐도 기분 좋은 사진이 될 수 있도록 제가 열심히 잘하겠습니다."

대통령의 그 다짐은 과연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일까요? 홈페이지 '봉하사진관'이 날마다 보여주는 '사람 사는 세상'의 모습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