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하일기 6] 봉하마을의 '희망 만들기'

2008. 4. 19. 18:09사람 사는 세상

[봉하일기 6] 봉하마을의 '희망 만들기'


정구철(前 국내언론비서관)


대통령에게 아이들은 특별합니다. 아마 봉하마을을 찾는 방문객 중 가장 환대받는 손님일 것입니다. 부모님과 함께 온 아이들이 보이면 대통령의 얼굴이 환해집니다. 반갑고 흐뭇하고 정겨운 표정입니다. 그래서 대통령은 무엇인가를 주고 싶어 합니다. 멀리서 찾아온 손자, 손녀에게 뭐든지 챙겨주고 싶어 하는 영락없는 할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장난을 걸기도 하고, 어디에서 왔는지, 몇 살인지,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물으면서 관심을 보입니다. 짧은 만남이지만, 그 시간을 통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아이들의 가능성에 좋은 영향을 주기를 바라는 대통령의 배려가 묻어 있습니다.


"학원 말고 선생님한테 배우세요"

4월 둘째 주 주말의 대통령 일정도 아이들에 대한 대통령의 특별한 사랑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11일 금요일 오전 대통령은 아이들 앞에 서 있었습니다. 양산 오봉초등학교 학생들입니다.

생가를 둘러보고 나온 학생들에게 대통령이 "옛날에는 초가집이었다""별로지"라고 묻자 아이들이 "아니요"라고 합창합니다. 고개까지 흔들며 강하게 부정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라해 보이는 생가지만 아이들에게는 뭔가 와 닿는 것이 있었던 듯싶습니다. 대통령의 작별인사가 재미있습니다. "학교공부 열심히 하세요" "학원 말고 선생님한테 배우세요".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들이 소리내어 웃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대통령은 자전거를 타고 봉화산 기슭으로 갑니다. 또 다른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이번에는 좀 머리가 큰 학생들입니다. 진주 외국어고 학생들이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등학생들이라 그런지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농촌문제, 지역감정, 재임시절의 고민과 어려움 등을 주제로 꽤 긴 시간의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다 옮길 수는 없고 인상적인 것 한두 가지만 전해드리겠습니다.


패배는 승리의 밑천

질문 중에 '가장'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가장 좋았던 일, 가장 아쉬웠던 일 등 많이 접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대단히 평범해 보이는 이 질문에 대해 대통령은 대답을 망설였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은 "참 대답하기 곤란하다""언제부터인가 그런 질문에 답변을 하지 않게 됐다"고 뜻밖의 답변을 했습니다. 줄을 세우고, 순서를 매기고, 그 순서에서 앞선 '1등만 기억하는' 세상에 대한 대통령 나름의 문제제기였습니다. "우리는 1등과 승자만 주목한다. 그러나 세상의 99%는 가장이 아닌 사람들이다. 좋은 일과 나쁜 일조차 가장 좋았던 일과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구분한다. 나에게 가장이란 없다. 좋았던 일의 덩어리가 있고, 나빴던 일의 덩어리가 있다. 그러나 돌아보면 나빴던 일도 항상 나쁜 것은 아니고, 좋았던 일도 언제까지 좋았던 것은 아니다. 나쁜 일도 좋은 일의 밑천이 되기도 했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를 보면 진 사람도 있고 이긴 사람도 있다. 그러나 진 사람도 그 패배 속에 다시 승리할 수 있는 40% 정도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한낮의 뙤약볕 아래에서 대통령은 학생들과 그룹별로 나눠 일일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주변에 있던 방문객 몇 사람이 "모자도 안 쓰고 저렇게 오래 사진을 찍으면 금방 얼굴이 타는데"라며 안타까워했지만 대통령은 마냥 즐거워 보였습니다.

12일 오후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봉화산에 장군차 묘목을 심을 때도 주인공은 아이들이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온 아이들 30여 명을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모두 불러내 대통령은 함께 묘목을 심었습니다. 묘목을 넣은 구덩이에 대통령이 흙을 덮고 아이들에게 꼭꼭 밟으라고 합니다. "왜 흙을 꼭꼭 밟는지" 묻고, 그 이유를 자상하게 설명합니다. 고학년쯤 돼 보이는 아이에겐 '모세관 현상'이라는 꽤 전문적인 용어를 써가면서 알려주기도 합니다. 어느새 대통령은 인자한 시골학교 교장 선생님의 모습으로 변해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희망 일구기

일요일인 13일 아침에는 손녀들을 수레에 태우고, 자전거로 마을 산책을 하기도 했습니다. '남의 아이'들만 챙기는 것 같아서 손녀들에게 미안했기 때문일까요? 이날 대통령이 손녀들과 함께한 자전거 산책은 큰 화제가 됐습니다. 덕분에 대통령의 별명은 한 가지가 더 늘었습니다. "노기사 운전해"의 노기사로 말입니다.

대통령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어쩔 수 없는 천성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만큼 각별하고 애틋하고, 진지합니다. 대통령은 최근 '아이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는' 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곤 합니다. 얼마 전 과거 당에서 함께 일했던 젊은 당직자 몇몇이 방문했을 때에도 대통령은 기본과 규칙이 존중되는 정치를 얘기하면서 '아이들이 보고 배울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아이들은 희망이고 미래입니다. 그 아이들을 정겹게 보듬으면서, 이 봄 대통령은 희망을 일구고 있었습니다.


질보다 양, 밥심으로 사는 봉하사람들

아직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봉하 비서실 식구들은 완전히 '촌사람'이 됐습니다. 우선 밥 먹는 게 다릅니다. 질보다 양입니다. 부녀회 식당에서 비빔밥을 먹으면서 국물은 '소고기 국밥'으로 달라고 천연덕스럽게 주문합니다. 농부는 '밥심'으로 산다고 하는데 영락없이 그 모습입니다. '봉하찍사'라는 이름으로 사진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전직 비서실 직원들이 있는데, 9시면 눈꺼풀이 내려온다고 합니다. 서울에 있을 때는 스스로 '야행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체질이 바뀐 모양이라며 웃습니다.

마을 공동작업을 담당하고 있는 김정호 전 비서관은 마을 주변의 꽃, 풀들은 물론이고, 지역의 역사나 생태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없습니다. 점심을 먹고 함께 사저로 돌아오는데, 마을 어귀에서부터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많아서 한참 걸렸습니다. 참견은 또 얼마나 하는지요? 딸기를 파는 마을 아주머니들과 한참 동안 너스레를 떠는데 장난이 아닙니다. 덕분에 옆에 서 있다 딸기도 먹고, 식혜도 한 잔 얻어 마셨습니다.

봉하 비서실의 맏형인 이호철 전 민정수석은 요즘 부인에게 꽤 잔소리를 듣는다고 합니다. 대통령 옆에 자주 있게 되고, 그 때문에 사진이나 TV 화면에 얼굴이 가끔 나오곤 하는데, 영 안 멋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봐도 '전직 수석'의 냄새는 전혀 나지 않는 농사꾼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농사일하기에는 그게 편하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마음까지 농부를 닮아가게 되는 것을 말입니다.

대통령도 이미 '이웃 할아버지'로 공인이 끝난 것 같습니다. 12일 처음으로 청바지 차림으로 방문객들 앞에 나섰는데, '대통령의 청바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오늘 처음 청바지를 입고 나왔는데 어떠시냐고 물으면, 오히려 놀랍니다. "처음이신가요. 많이 입으셨던 것 같은데". 그 대답이 오히려 기분이 좋습니다.


고민과 모색 - 살기 좋은 지역만들기

대통령과 봉하 식구들은 그렇게 농촌과 농부의 마음으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만든 '새로운 관계'는 살기 좋은 지역만들기라는 대통령의 구상과 계획의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 때문에 봉하의 봄은 분주합니다. 아직은 공부하고, 연구하고, 계획하는 것이 많습니다.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추진할지를 마을 분들과 모여서 의논하고, 필요하면 관련되는 단체나 기관과 상의하고 그런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제가 도착하던 11일 오전, 이호철 전 수석의 얼굴은 부석부석하고 피곤해 보였습니다. 친환경농사 문제로 전날 밤 마을 주민들과 밤늦도록 회의를 한 뒤 이어진 뒤풀이로 집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김정호 전 비서관은 서둘러 점심을 먹은 뒤 농촌공사 사람들과 유기농업에 필요한 물 문제를 협의하고 있었습니다. 봉화산 기슭에는 간벌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봉화산이 갈 때마다 조금씩 달라 보입니다.

대통령은 12일 오전 화포천 일대를 둘러보았습니다. 특히 마을 주변 농수로를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농사에 필요한 좋은 물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수로에 오염물질이 들어오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염원이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곳을 대통령은 일일이 체크하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당부했습니다. 주변의 축산농가에 들러 축산분뇨 처리상황을 묻기도 했습니다. 지나가는 마을 분들과 만나 환경순찰대나 감시단을 만드는 문제도 논의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한 단면입니다. 그래서인지 너무 바쁩니다. 서로 얼굴 보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점심이 회의로 바뀌는 일은 거의 매일 있는 일입니다. 이날 점심에서도 화포천 청소 계획, 오후에 도착할 자원봉사단의 작업 배정 등이 논의되고 결정됐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화포천 습지 살리기, 봉화산을 아름답고 포근한 숲으로 가꾸는 일, 테마가 있는 관광마을 조성, 친환경농업, 지역의 특성에 맞는 소득작물 재배 등 어느 것 하나 쉽고 만만한 일이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중 구체적인 사업을 시작한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이 더 많습니다.

시행착오도 있었습니다. 처음 장군차를 심을 때는 기술 부족으로 심은 묘목의 30%밖에 건지지 못했습니다. 장군차가 워낙 예민한 식물이라 전문가가 심어도 생존율이 그렇게 높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평균보다 훨씬 낮은 생존율 때문에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70~80% 가까이 살려내고 있습니다. 노하우가 생긴 것이지요. 지식농업이라는 게 별건가요. 이처럼 실패를 통해 노하우가 쌓이고 그것이 우리 모두의 것으로 공유되는 과정을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농촌공동체의 '희망의 발견'

대통령은 앞으로 살기 좋은 지역만들기 사업을 공유와 참여, 개방이라는 웹 2.0 방식으로 해 볼 구상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오리농법, 봉화산 토양에 맞는 수종 선정 등 고민이 있을 때마다 문제의 내용과 그동안의 과정을 웹을 통해 공개해서 관련되는 분들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집단의 지식 및 다수의 참여와 협력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통해 농업문제를 극복해 보겠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봉하의 살기 좋은 지역만들기는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고민과 모색, 실험의 단계를 거치고 나면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전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통령의 꿈은 유기농이나 아름다운 숲, 생태의 복원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한 농촌공동체의 '희망의 발견'이라는 것입니다. 실현 가능한 목표와 비전이 생기면 사람들은 모입니다. 찾아오는 농촌, 돌아오는 농촌은 그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지금 봉하에는 봄이 가득합니다. 그 봄 향기 아래서 새로운 시도와 모색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못 보던 나무가 보이고, 산과 마을, 그 마을을 돌아 흐르는 물길의 모습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표정에도 변화가 보입니다. 그것은 희망의 냄새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