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춘화와 소년병, 전쟁터 부상병들...

2007. 9. 7. 21:51관심사

2005년 10월 10일 (월) 15:58   오마이뉴스
"춘화와 소년병, 전쟁터 부상병들... 내겐 그들의 삶 기록할 의무가 있다"
[오마이뉴스 이한기·노순택 기자]
▲ 류춘도. 스물네살 여린 나이에 의용군 군의관이 되어 종군했던 그가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한국전쟁에 관한 자신의 과거를 찾고자 길을 나섰다. 지리산 피아골.
ⓒ2005 노순택


류춘도. 1927년생.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다. 이십대 초반에 의사가 됐고, 일흔이 넘어서 시인으로 등단했다. 고인이 된 남편은 서울대 수학과 교수를 지냈고, 큰 아들은 본인의 대를 이어 병원장을 맡고 있다. 현재 강남의 고급 단독주택에 살고 있는 그는 누가 보더라도 근심 걱정 없어보이는 상류층이다.

그런 그에게도 '그늘'이 있다. 그 스스로 자신의 삶에는 잊혀지지 않는 슬픈 역사가 똬리를 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잊혀지지 않는 건 역사가 아니라 그 속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단 한 번도 남편과 자식들에게조차 꺼내지 못했던 그의 인생역정. 그 한 가운데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반세기가 더 지났건만, 그에겐 엊그제 벌어진 일처럼 또렷하다. 전쟁 통에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억울한 영혼들이 그에게서 '망각'이란 단어를 빼앗은 탓일까. 최근 그는 아린 기억의 편린들을 모아 <벙어리 새>(당대 펴냄)라는 책을 펴냈다. 병을 앓듯 끙끙대며 지난날을 복기한 결과물이다.

우연 같은 필연, 필연 같은 우연으로 다가온 한국전쟁

1930년대 초, 다섯 살 때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10여 년을 그 곳에서 보냈다. 일본에서 여고를 졸업하고, 해방 한 달 뒤인 1945년 9월에야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6년 서울여자의과대학(우석대·고려대 의대의 전신)에 입학했고, 졸업반인 1950년 한국전쟁을 맞았다.

그에게 한국전쟁은 우연 같은 필연, 필연 같은 우연으로 다가왔다. 화창한 일요일이었던 1950년 6월 25일 중간고사를 마친 그는 친구와 함께 수도극장(현 대한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영화 제목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애증을 넘어서'. 그가 나중에 <성혜랑 회고록>을 보고서야 알았던 일이었지만, 그 극장의 또 다른 자리에는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의 이모였던 성혜랑도 앉아 있었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영화는 몇분 지나지 않아 영사기의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멈췄다. 잠시 뒤 영화관 안에 불이 켜졌다. 곧 이어 스피커를 통해 아나운서의 흥분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삼팔선에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휴가중인 장병들은 속히 부대로 복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게 6·25 전쟁은 그렇게 다가왔다.

▲ 과거를 더듬기 위해 몇 번이고 남강을 찾았다. 지난 봄, 시체가 널부러져 발 디딜 틈이 없었다던 둑 아래엔 자주빛깔 자운영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2005 노순택


당시 스물네살의 의대 5학년 졸업반이었던 그는 전쟁 발발 직후 북한 의용군에 입대해 군의관으로 인민군을 따라 남하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의 최대 격전지 가운데 하나였던 남강전투 등을 경험했다. 당시의 기억이 그에게는 화인(火印)처럼 남았다.

아 아 통한의 남강이어

낯선 군홧발이 밀려오던 날

형제들의 붉은 피로 물들여진

너를 보았노라

통곡하며 몸부림치던

너를 보았노라

병사들의 외침은

이젠 간데없고

세월따라 강물만

말없이 흘러가네

겨레의 한을 안고

강기슭의 억새풀은

피물 먹고 자라서

저토록 무성하나

옛날을 증언하듯

강물을 스쳐가는 바람소리

영혼들에 바치는

어머니의 슬픈 노래

지나가는 길손 발 멈추는

아 아 통한의 남강이어


지난 2002년 11월 11일 그는 52년 전을 회상하며 남강을 찾았다. 1950년 9월 남강은 "미군 요격기의 네이팜탄이 불꽃처럼 쏟아져,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병사들의 시체가 떠내려 간" 통한의 강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돌아오지 못할 병사를 이끌고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이들"을 기억하며 온몸으로 시를 썼다.

▲ 헤아릴 수 없었던 미군시체들, 전투에 나가 돌아오지 않았던 인민군들, 불에 그을려 신음하던 사람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남강은 그저 고요하게 흐른다.
ⓒ2005 노순택


그로 하여금 시를 쓰게 만든 사람은 장기수 할아버지·할머니들이었다. 1998년 11월 찾아갔던 '만남의 집'에서 그는 "50년 동안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젊은 날의 '소년병'과 똑같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듬해 5월 중풍으로 쓰러진 '마지막 여자 빨치산' 정순덕 선생 문병을 다녀온 뒤 그의 입에서 시가 터져나왔다.

"두 달 동안 밥 먹다 말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받아 적은 말들"이 51편의 시로 만들어져 <잊히지 않는 사람들>(1999)이 됐다. "필생의 한이 풀리고 전쟁의 악몽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잊어서는 안될 슬픔과 상처를 기록하기 위해" 다시금 펜을 든 그는 <당신이 나입니다>(2002)라는 두번째 시집을 펴냈다. 그리고 지난 9월에는 자전적 에세이 <벙어리 새>를 낳았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내는 초혼(招魂) 같은 기록

- <벙어리 새>를 읽다보면 개인일기 같기도 하고, 전쟁기록 같기도 하고, 전쟁통에 죽은 지인들이 당신의 몸을 빌어 자기들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 같기도 하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내는 초혼(招魂) 같은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가 죽은 사람들을 불러내 그들의 이야기를 쓴 것이니까. 내 머리 속에 박혀 있는 기억이고, 그 사람들의 영혼이 나와 같이 있어 떨어지지 못하는… 그러니까 50년이 지나도 기억할 수 있는 것이고. 나는 자면서도 그 사람들과 대화를 한다."

그의 <벙어리 새>를 읽으면서 불현듯이 다른 두 권의 책이 떠올랐다. '한 사학자의 6·25 일기'라는 김성칠 교수의 <역사 앞에서>와 다이 호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건 아니지만 <역사 앞에서>는 주제와 내용 면에서, <사람아 아 사람아>는 느낌과 형식 면에서 묘한 공통분모가 느껴졌다.

- 책을 쓰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내 머리에 박혀 있지 않은 것, 희미한 것을 생각해 낼 때다. 반드시 책을 써야 한다는 의무가 있어 (머리 속에) 박혀 있는 건 모조리 꺼냈다. 그런데 박혀 있지 않는 것도 있지 않겠나. (그걸 기억해내는) 그게 어려웠다."

순간 그의 말이 멎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는 "감정이 북받치면 저절로 그게 나오는데, 춘화 생각도 나고, 그 광경이 떠올라 어제 일처럼 북받치는 거야"라며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새삼 그가 시집 서문에 썼던 "시 하나 쓰고 눈물 한 바가지를 쏟았다"는 말이 떠올랐다.

▲ 길을 나서기만 하면 눈물 바람이다. 지친 몸으로 하룻밤을 묵었던 남원 도립병원. 이제는 청소년 문화센터가 들어선 그 옛터에서 류춘도는 돌멩이 하나 들고 눈물을 삼켰다.
ⓒ2005 노순택


- 50여년 전 일이면 잊혀질만도 한데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을 하고 있다.

"전등이 있으면 가운데가 강하고 주변은 희미하다. 난 그 등의 심지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나는 (기억을) 되풀이한다."

- 좀더 일찍 책을 펴낼 수도 있었을텐데.

"누구나 나이 70이 넘으면 내가 언제 죽을 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아무 것도 없어지잖아. 흔적없이 사라진다는 건 허무하다. (전쟁 속에서 억울하게 죽은) 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게 내 의무이자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다시금 울먹이며) 너무하잖아.

해방 공간을 지내면서 내 주위 젊은 사람들이 소신으로 몸을 바쳤다. 춘화처럼, 정자처럼. 전쟁을 통해 자신의 청춘을 다 바친 아까운 사람들. (부상병 등) 내 손을 거친 사람들. 얼마 못 살다간 그 사람들을 떠올리면 (기록을 남기는 일을) 여사로 생각할 순 없지. 나는 그 사람들의 어머니까지도 생각한다. 누가 보면 편하게 살 수 있을텐데 하겠지만 난 편하게 살 수 없다. 인간에 대한 애정, 나는 거기에 사로잡혀 있고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춘화의 본명은 김익신. 그가 부산에 살 때 한 동네에 살았던 두 살 아래 동생뻘로 유난히 그를 따랐다고 한다. '춘화(春和)'로 이름을 바꾼 것도 그를 사모한 탓이었다고. 서울 상대에 다니던 춘화는 전쟁 통에 사라졌다. 이대를 다니던 친구 박정자는 1952년 소위 '부산여자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38년 여를 감옥에서 지내다 출소했다. 그는 출소 후 양로원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정자의 처지를 두고두고 가슴 아파했다.)

그는 책을 집필하기 전부터 이미 자기 역사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지리산 피아골, 남강, 남원 도립병원 자리, 경호강 등을 여러차례 다녀왔다. "시를 쓰다가, 글을 쓰다가 문득 가보고 싶을 때" 그는 그 곳에 찾아가 운명을 달리한 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다 가슴이 먹먹해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리영희 교수와의 만남... "동무하자"며 뜨거운 포옹

2002년 효순이와 미선이의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해 12월 14일 촛불시위에도 참가했던 그는 한동안 "적개심 때문에 잠을 못 이뤘다". 억울하게 꺾인 두 꽃봉오리 앞에서 몸서리치며 한국전쟁을 떠올렸다. 5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미군은 우리에게 무엇이냐"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상심한 그들의 부모 모습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달맞이 꽃

어머니 6월의 그 날은

햇살이 눈부시게 빛났지요.

찔레꽃 향기 가득한 길을

산들바람 속삭이며 지나갔지요.

14살 우리는 꽃봉오리요

새아침 밝아오는 희망이랬죠.

아버지 소 몰고 가시던 길에

낯선 깃발 꽂은 장갑차가

14살 우리의 꿈 앗아갔어요.

정겨운 학교길을 핏물들이며

왜 죽는가 물으며 숨져갔어요.

찔레꽃 숨죽이며 울었어요.

그날 그길에 노을이 지면

미선이 효순이의 어여쁜 넋이

샛노란 달맞이꽃 되었데요.

밤새 아빠 엄마 꿈을 꾸다가

새벽안개 그길에 자욱할 때면

소리없이 떨어지는 꽃 되었데요.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는 시 '달맞이 꽃' 때문에 그는 지난해 정보기관의 조사를 받았고, 아직까지도 기소유예 상태다. 이 시가 총련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조선신보>에 게재됐고, 이후 노래로 만들어져 북한의 인민배우가 불렀다는 이유 때문이다. 출소 장기수들이 북송될 때 지은 시 '고향길'도 이와 비슷한 굴레를 썼다.

▲ 수차례 헛걸음을 하고서야, 겨우 찾은 경호강 그 자리. 긴장 속에 진행됐던 도강작전. 모래톱 위에 드러누워 숨을 고르던 그 기억.
ⓒ2005 노순택


지난 5일 책으로만 접했던 류춘도 할머니를 그의 집에서 만났다. 그는 달떠 있었다.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리영희 교수와 두 차례나 만났던 직후였기 때문이다. 효순·미선 촛불집회 때 그도 리 교수도 현장에 있었다. 이후 리 교수의 책 <대화>를 읽고 감명을 받은 그는 서승 일본 리츠메이칸대 교수의 소개로 '존경하는' 리 교수를 만났던 것이다.

"<대화>를 밤새서 읽으며 굉장한 감동을 받았어. (리 교수가) 강렬하게 표시한 데에는 나도 똑같이 공감했거든. 베트남 사람들에 대한 아픈 생각이나, 노신의 생가에 가서 눈물을 흘렸다는 대목이 그렇지. 거리낌 없이 솔직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 그 속에서 (리 교수의) 냉철하면서도 약자에 대한 사랑을 느꼈지."

1950년 남강전투 때 그는 의용군 군의관으로 인민군의 편에 서 있었고, 리 교수는 남한군쪽에 서 있었다. 다소 시간과 공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전쟁은 그 두 사람을 그렇게 갈라놓았다. 그리고는 50여 년이 지난 2005년 그 두 사람은 만나서 서로를 위무하고, "동무하자"며 따뜻한 포옹을 했다. 사람에 대한 갈망이 그 두 사람의 벽을 한 순간에 허물어버린 셈이다.

'노래를 잊었다'는 벙어리 새. 더 이상 류춘도 할머니는 벙어리 새가 아니다. 그는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노래를 잊지 않으려 50여 년 동안 독백처럼 읊조렸다. 그리고 마침내 입 밖으로 소리내어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는 심장이 멎을 때까지 그렇게 하겠단다.

인터뷰 말미에 그에게 물었다. "할머니,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지우고 싶은, 잊고 싶은 역사가 있나요?" 머뭇거림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고생 안하고 편하게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오히려 내가 그런 걸 겪어봤기 때문에 더 많은 걸 생각할 수 있었거든. 인간에 대한 사랑도 배웠고.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다시 선택한다고 해도 편한 삶을 택하진 않았을 거야."

▲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남씨 제실. 인민군 야전병원이 세워졌던 그곳에서 다시 숨죽여 울었다. 전쟁에 관한 이 쓰린 기억, 과거의 일이기만 할까.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에서 자유롭지 않다.
ⓒ2005 노순택


/이한기·노순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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