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을 부탁한 김대중, 김대중을 선택한 노무현

2012. 8. 17. 16:01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을 부탁한 김대중, 김대중을 선택한 노무현

구술이야기 2012.08.17

노무현을 부탁한 김대중, 김대중을 선택한 노무현
‘꼭 필요한 정치인’이자 ‘꼭 필요한 지도자’로 시대를 같이하다

노무현재단 사료편찬위원회


2003년 12월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세계인권선언 55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기념식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은 연설 말미에 국가인권위원회를 거론하며 이렇게 말했다.

"인권위원회가 만들어지고 활동하도록 부단히 투쟁하고 노력해 오신 많은 분들의 노고에 거듭 치하의 말씀을 드리면서, 끝으로 제가 빠뜨리고 싶지 않은 한 분을 다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인권위원회를 만드실 때, 저도 ‘어지간히 됐는데 인권위원회 만들어서 뭘 할 것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지금에야 그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정치인이 아닌, 철학을 가진 지도자가 우리에겐 꼭 필요하고, 그런 지도자를 가졌던 것이 참으로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꼭 필요한 지도자, 꼭 필요한 정치인

노 대통령에게 김대중 대통령은 철학을 가진 지도자, 꼭 필요한 지도자였다. 시계를 1995년으로 돌려보자. 당시 노무현 부총재가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해 낙선한 6·27지방선거 이후 민주당은 신민당과 통합 4년 만에 다시 분당(分黨) 상황을 맞았다. 그해 7월 18일 김대중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의 정계 복귀 및 신당 창당 선언, 9월 5일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이 이어졌다. 정치를 재개한 김대중 이사장에게 노무현 부총재는 꼭 필요한 정치인이었다. 당시 노무현 부총재와 함께 민주당 잔류를 선언하며 구당(救黨)모임을 결성한 김원기 전 국회의장의 회고다.



(발언전문) "그래서 이제 선거를 치르고 났는데 그 이후에 이런 일(국민회의 창당과 민주당 분당)이 벌어졌어요. 그래서 끝까지 노무현 대통령하고 같이 분당에 대해 반대하던 입장을 내가 취했는데. 김대중 대통령은 내가 안 따라오리라는 생각은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오랫동안 가까이 모시고 그러던 처지이고. 나는 반대는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자기하고 딴 길을 가지는 않을 거라고 그 양반이 생각을 하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염려를 많이 했어요. 노무현 대통령이 와주면 좋은데 말해야 들을 사람도 아니고. 그러니까 내가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고 헤어져서 회의가 끝나서 나오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엘리베이터까지 오셔가지고 나보고 “김 최고위원, 노무현은 딴 사람 말 안 듣고 김 최고위원 말은 듣잖아. 노무현 설득 좀 해줘” 나보고 간곡하게 부탁을 하더라고. 그때 노무현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고 나도 이제 되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왔고 그런데 저 양반이 나에 대해서는 최종적으로는 자기하고 행동을 같이 할 것이다 생각하고 노무현 부탁만 그렇게 하더라고. 노무현 좀 설득해달라고."

노 대통령은 민주당에 남았다. 그리고 1995년 12월 민주당은 개혁신당과 함께 통합민주당으로 재출범한다. 1996년 4·11총선에서 처음 부산이 아닌 서울 종로에 출마한 노 대통령은 세 번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노 대통령은 그해 11월 9일 출범한 ‘개혁과 통합을 위한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에 몸담는다. 지역주의 타파와 정치개혁을 기치로 내건 통추는 김원기 대표를 비롯해 제정구·이수인·이미경·김홍신 의원, 이철·김정길·김원웅·유인태·원혜영 전 의원 등 구당모임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 내 개혁파 인사들과 재야진영이 참여했다.

기로에 선 통추, 노무현의 선택

 
[사진설명]1997년 11월 10일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 대선후보와 통추 소속 정치인들의 만찬. 통추는 전날인 11월 9일 상임집행위에서 소속 정치인 각자의 정치적 판단을 존중하기로 하고 1년 만에 해산한다. 노 대통령과 김원기 대표, 김정길·박석무·유인태·원혜영·홍기훈 전 의원 등은 김대중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11월 13일 국민회의에 입당했다.

1997년 대선의 해로 접어들면서 정치권이 요동쳤다. 그해 10월 27일 김대중 국민회의 대선후보가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후보단일화에 합의했다. 11월 4일에는 신한국당 경선에서 패배한 이인제 경기도지사가 국민신당을 창당했다. 다음날인 11월 5일 민주당 조순 총재, 신한국당 이회창 총재가 합당을 발표했다(11월 21일 한나라당으로 출범).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통추도 선택의 기로에 섰다. 김원기 전 의장은 노 대통령에게 깊은 감명을 받은 일 가운데 하나로 이때를 기억한다.


(발언전문)"그때 가능하면 우리가 후보를 내서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현역 교섭단체도 갖지 않는 그런 조직이었고 하기 때문에 사실 대통령 후보를 내어가지고 당선시킬 그런 힘은 없었고. 그래서 나중에 결국 우리가 일종의 정치결사인데 대통령선거에서 이쪽저쪽도 아닌 채 있을 수 없는 거고 선택을 해야, 우리가 (후보를) 내지 못하면 선택을 해야 하는데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오랫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서 심각한 논의를 많이 했어요. 근데 마지막 회의에서, 그러면 어떻게 선택을 하느냐. 결국 김대중, 이회창 둘 중에서 선택을 해야 되는데. 내가 노 대통령이 참 대단한 정치인이다, 라고 생각을 하는 대목이 경상도라는 데서 김대중을 업고 그렇게 고초를 받고 수없는 선거에 실패를 하고 그랬는데 그런 사람이 김대중을 선택을 또 한다면 자기 길도 막막하다고. 나야 이제 지역이 호남이니까 김대중하고 재결합하면 이익이지 해로울 것이 없잖아. 그런데 제일 먼저 노무현 대통령이 이런 주장을 했다고. ‘우리가 독자적으로 후보를 못 낼 바에는 비판을 하고 하더라도 김대중을 선택하는 것 말고 딴 선택은 못하는 것 아니냐.’ 그것을 노무현 대통령이 했어요, 그 주장을. 그러니까 경상도에서 출마해야 될 사람이, 또 낙선이 100%인데 그런데 ‘우리가 김대중 말고 딴 사람을 선택할 명분은 없지 않냐, 김대중 선택하는 방법밖에 없지 않냐’, 그 주장을 노무현 대통령이 했어요. 그래서 말하자면 대세가 김대중으로 이렇게 잡히는데, 호남에 있는 정치인이 그렇게 하면 설득력이 모자란다고. ‘좀 고생하더니 지 신세 생각해서 그런가’ 하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그러잖아. 근데 노무현 대통령이 분명하게 그 주장을 한 것이 우리가 김대중 후보를 선택하는 데 아주 명분이 됐지. 그런 정치인이 두 번 나오긴 힘들 거야."

통추는 1997년 11월 9일 상임집행위에서 각자의 정치적 판단을 존중하기로 하고 꼭 1년 만에 해산한다. 노 대통령과 김원기 대표, 김정길·박석무·유인태·원혜영·홍기훈 전 의원 등은 11월 13일 국민회의에 입당했다. 두 전직 대통령의 자서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호남을 고립시켜 놓은 지역구도 정치지형에서 고립당한 쪽을 거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분열에서 정치적 이익을 얻는 쪽에 가담하는 것은 어떤 논리로도 당당하게 설명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운명이다> 145p

11월 13일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의 김원기 대표와 노무현, 김정길 등 8명의 상임집행위원의 국민회의 입당 서명식이 있었다. 이들의 공동 입당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나는 통추 소속 정치인들의 명분 있는 행동을 크게 신뢰하고 있었다. 자민련과 연합으로 오른쪽 날개를 얻었다면, 이들의 입당으로 왼쪽 날개를 얻게 되었다. <김대중 자서전> 1권 668p

대통령과 대선후보로, 전·현직 대통령으로



[사진설명]1997년 11월 13일 노무현 국민회의 부총재는 입당 후 곧바로 김대중 후보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15대 대선 전날인 12월 17일 마지막 유세를 함께하고 있다.


노무현과 김대중, 두 정치인은 그렇게 다시 만났다. 국민회의 부총재 노무현은 곧바로 대선후보 김대중의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부산경남선대위 공동의장, 파랑새유세단(수도권특별유세단) 단장을 맡으며 곳곳을 누볐다. 12월 18일.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1,032만6,275표(40.27%),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993만5,718표(38.74%). 15대 대선 결과 최초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4년여가 흐른 2002년 4월, 둘은 현직 대통령과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로 만났다. 김 전 대통령의 자서전에 따르면, 두 사람은 이런 말을 나눴다.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이틀 뒤였다.

4월 29일 노 후보를 만났다.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할 때 정치에 간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국민들도 그런 결정을 잘했다고 여깁니다. 앞으로도 국정과제 마무리에 전념하겠습니다.”
“국민의 정부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게 아쉽습니다. 저는 국민의 정부를 당당하게 평가해왔고, 그렇게 소신껏 얘기하면서 후보로 뽑혀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김대중 자서전> 2권 478p

그해 12월 19일 16대 대선. 민주당 노무현 후보 1,201만4,277표(48.91%),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1,144만3,297표(46.58%). 국민들은 김대중 대통령의 후임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선택했다. 김대중과 노무현, 전·현직 대통령으로서 둘의 새로운 동행이 시작됐다.

그리고, 지도자가 지도자를 말하다



[사진설명]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10월 9일 김대중 전 대통령 내외를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 했다. ‘2007 남북정상회담’ 결과와 향후 추진방향 등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김 전 대통령의 말을 노 대통령이 미소 지으며 듣고 있다.

끝으로 두 대통령의 서로에 대한 인식과 평가의 일단을 들어볼 차례다. 취임 첫해인 2003년 12월 10일 노 대통령은 세계인권선언 55주년 기념연설에서 김 대통령을 철학을 가진 지도자로 높이 평가했다. 퇴임 한 달을 앞둔 2008년 1월 18일 다큐멘터리 5부작 ‘참여정부 5년의 기록’ 제작을 위해 촬영한 인터뷰에서도 노 대통령은 김 대통령을 민주주의 투사이자 사상가, 특별한 지도자로 추앙했다.


(발언전문)"김대중 대통령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지도잡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그만한 기간 동안 독재와 싸우고, 더욱이 구속되고 사형선고까지 받고 그러면서도 굽히지 않고 계속해서 민주주의 노선을 유지하면서 투쟁을 계속해온 사람은 보통의 경우에는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국민의 힘에 의해서 민주정부가 들어서면 보통은 거의 무투표 당선 수준의 지도자가 되고요. 그러고 거의 ‘건국의 아버지’ 이런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정상입니다. 정상인데 우리가 이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민주세력이 분열됐다는 것. 그것이 하나 있고 원체 빨갱이로 덧칠을 해놨기 때문에 국민들이 김대중 대통령을 단순한 민주주의 투사로 보지 않고 자꾸만 친북인사로 보는 것이죠.
김대중 대통령은 그냥 투사만이 아니고 사상가죠.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고 있고, 그리고 그것을 항상 전략적으로 요령 있게 판단할 줄 아는 지혜도 가지고 있는 아주 특별한 지도자죠. 우리가 잘 못 알아볼 뿐이죠."


2009년 5월 29일 노 대통령 영결식에서 정부의 반대로 읽지 못한 김대중 대통령의 조사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노무현 대통령, 당신,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우리 마음속에 살아서 민주주의 위기, 경제 위기, 남북 관계 위기 이 3대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힘이 되어 주십시오. 당신은 저승에서, 나는 이승에서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지켜냅시다. 그래야 우리가 인생을 살았던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당신같이 유쾌하고 용감하고, 그리고 탁월한 식견을 가진 그런 지도자와 한 시대를 같이했던 것을 큰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저승이 있는지 모르지만 저승이 있다면 거기서도 기꺼이 만나서 지금까지 하려다 못한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동안 부디 저승에서라도 끝까지 국민을 지켜주십시오. 위기에 처해 있는 이 나라와 민족을 지켜주십시오. <김대중 자서전> 2권 592p




[관련 사료이야기] 김대중·노무현, 둘이면서 하나였던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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