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포천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슬금슬금 봉화산(烽火山)을 향해 느린 등반을 시작하는 시간. 영롱한 이슬을 머금은 풀숲에 작업복 차림의 한 남자가 커다란 기지개를 켜며 봉하의 이른 아침을 연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참모로 일하며 5년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보좌했고, 그가 역대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퇴임 뒤 고향 봉하마을에 돌아와 한사람의 깨어있는 시민이자 농군으로 살고자 했을 때도, 그리고 믿기 힘든 서거와 이후 하나둘 떠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굳건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남자.
영농법인 (주)봉하마을의 김정호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조차 ‘바보’라고 불렀을 만큼 제 할일에 우직하고 뚝심이 강한 사람이다. 그가 걸어온 지난 8년의 궤적은 마치 커다란 붓으로 힘주어 쓴 한 획의 글자 같다. 어느덧 뽀얀 얼굴에 말끔한 정장 차림이던 그는 온데간데 없고 햇볕에 검게 그을린 피부와 낡은 셔츠, 그리고 흙묻은 장화를 신은 모습이 오늘의 김정호를 말해준다.
“봉하는 올해도 풍년입니다”
영농법인 (주)봉하마을 사무실이 있는 이른바 ‘봉하쌀 방앗간’(친환경미곡종합처리장)은 올해 수확한 나락을 도정하느라 연일 밤낮 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나락 한 톨도 허투루 보지 않고 꼼꼼하게 주워 담는 것이나, 복잡한 농기계를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이 이제는 누구도 김정호 대표를 ‘초보 농군’이라 부르지 못할 것 같다.
“봉하오리쌀-우렁이쌀은 2008년에 50톤(2만4천600평), 2009년에 424톤(24만평)을 수확한 데 이어 올해는 약 550톤(30만평)을 재배해 풍년을 맞았습니다.”
올해는 소비자들이 반길 희소식도 여럿 전해졌는데, 지난 8월 21일에는 토양과 수질검사에서 무농약 기준치 이하로 적합판정을 받아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부터 ‘친환경농산물인증서(무농약인증)’를 교부받았다.
또한 원산지와 재배지역, 생산일자, 판매자를 어디에서나 조회할 수 있는 ‘농산물이력추적등록제’로 소비자가 좀더 안심하고 봉하 친환경쌀을 먹을 수 있게 했다. 얼마 전 획득한 ‘농산물우수관리인증(GAP)’ 역시 우리나라 친환경농업의 또 다른 상징이 된 봉하에 커다란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친환경농업 비율은 유럽이 약 20~30%, 일본이 15%, 한국이 6%로 상대적으로는 우리나라가 낮은 수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친환경 농산품’하면 으레 돈 많은 사람들, 특정 계층이 호사로 먹는 부의 상징물로 받아들여졌습니다만 지금은 인식이 많이 변하고 있습니다. 또 그래야만 하고요.
국내 쌀시장의 10%를 개방해야 하는 2014년에 이르면 중국이나 미국의 값싼 농산물이 물밀듯 밀려들 테고, 우리는 가격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 겁니다. 결국 품질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어요. 수입품은 대량생산을 위해 농약을 많이 치고 상품 변질을 막으려고 약품까지 첨가하기 때문에 믿고 먹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 농촌은 토지, 기후, 체질에 맞고 건강까지 책임질 수 있는 친환경농법으로 미래를 대비해야 합니다.”
김정호표 비료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흔히들 ‘친환경농법’은 화학비료나 농약을 치지 않기 때문에 병충해나 자연재해에 취약해 수확이 어렵고, 농가에 큰 가게부담을 준다고 생각한다. 과연 실제로도 친환경농법이 농민들에게 그렇게 부담스럽고 힘들기만 한 모험일까?
“친환경농법을 쓰기 시작하면서 봉하마을 농부들의 수익이 크게 향상되고 있습니다. 우선 친환경쌀에는 일반 수매가보다 30~40% 높은 값을 쳐주거든요. 작년에 일반쌀 40kg 나락이 5만원이었을 때 봉하오리쌀은 이보다 40%가 더 높은 7만원, 우렁이쌀은 30% 높은 6만5천원에 수매가 이뤄졌습니다.
같은 생산량이면 친환경쌀이 30~40% 더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어요. 생산과정에서도 생약이나 유기질비료, 농자재 등을 농가에 제공하고 일손이 필요할 때는 인력도 지원하기 때문에 화학농약을 쓸 때보다 20%의 자본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긴가민가했던 주변 농가에서도 친환경농법을 시도하려는 곳이 늘고 있다는 게 그 증거죠.”
김정호 대표는 그동안 쌓은 경험을 기반으로 내년에는 시설을 확충하고 생산량도 좀더 늘일 예정이라 한다. 다만 무조건적인 확산은 삼간다는 원칙은 지킬 참이다. 일방적인 양적 확대는 상품의 질을 떨어뜨리고, 동시에 관리소홀로 이어지기 때문에 어렵게 쌓은 신뢰를 잃을 수 있어서다. 봉하쌀이 여타 쌀과 다른 특별한 맛과 영양을 갖는 이유는 어쩌면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라는 김정호표 비료가 진하게 녹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365일 봉하는 쉬지 않는다
올해는 화포천 주변 약 9만평 대지에 친환경배추도 심었다. 화포천변은 지대가 낮아 침수우려가 높은 곳이고 태풍 등 기상 악조건 등의 제약이 있었지만 파종시기 날씨를 꼼꼼하게 살피고 재배에 필요한 요소를 충분히 점검한 덕분에 올해는 250톤 가량의 수확량을 얻을 수 있었다.
이번에 생산된 친환경배추는 절임배추와 포기김치로 나눠 <노무현재단> 후원회원에 이어 일반인들에게 예약판매를 시작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봉하 친환경배추의 인기비결은 배추 품종으로는 으뜸으로 알려진 ‘불암’ 씨앗을 파종했고, 화학비료 대신 자체 제작한 생약으로 해충방지와 영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래 없는 배추값 폭등에도 지난해 가격 그대로 배추를 판매한 것도 소비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배추값을 올리지 않은 것은 일반 쌀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의 체감도가 다소 높은 봉하 친환경쌀을 믿고 구입해준 후원회원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기도 하다. 한편 배추가 ‘금추(金趨)’가 되면서 ‘배추서리’라는 골칫거리가 생겨 화포천변에 텐트를 치고 돌아가면서 배추를 지켜야만 하는 웃지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예상보다 날씨가 좋아 약 8만 포기의 배추가 수확될 예정입니다. 무게만 해도 250톤에 달하죠. 수확물의 30~40%는 절임배추로, 나머지는 포기김치로 판매됩니다. 절임배추는 거의 예약이 끝난 상태고, 포기김치는 유통기한인 1개월을 넘기면 상품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 안에 판매를 완료할 생각입니다. 한 달이 넘은 것은 숙성김치로 만들어 3개월 정도 유통할 겁니다.”
추수가 마무리되면 50헥타르의 땅에 호밀농사를 지을 참이다. 무논은 철새들의 놀이터이자 쉼터로 탈바꿈하고, 배추를 재배하던 화포천변에는 유채꽃을 심어 내년 봄에 또 하나의 봉하 명소를 만들 포부도 갖고 있다.
모내기 때부터 커다란 관심을 끌었던 자색 벼글씨 “사람사는 세상”의 수확물은 소비자들의 요구에 맞춰 도입한 다양한 품종의 찹쌀, 흑미, 홍미, 녹미 등과 섞어 “사람사는 세상미(米)”로 다시 태어난다.
“형~”이라 부르고 싶은 남자
명색이 노무현 대통령의 유지를 받들어 영농법인의 장을 맡고 있는 사람인데, 김정호 대표를 칭하는 수식은 사람들마다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청와대 시절부터 그의 이름 뒤에 따라 붙었던 ‘비서관’이란 호칭을 고수하고, 어떤 이는 이웃집 형을 부르듯 “정호형~”한다. 연배가 높은 마을주민들은 아예 ‘정호야’ 하며 친구나 후배의 이름을 부르듯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김정호 대표는 이에 대해 정정을 요구하거나 이맛살을 찌푸리는 일이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 시절이나 퇴임 이후에도 일관되게 그랬던 것처럼 가장 낮은 자세로 사람을 대하려는 사려 깊음이 그에게서도 그대로 묻어난다.
때 아닌 비 소식에 더욱 분주했던 10월 23일 밤 봉하 방앗간. 저녁도 거른 채 보관창고를 뛰어다니던 김정호 대표는 자신을 “정호”라고 부르는 선배 농군을 손님으로 맞았다. 딴 데서 이미 전작이 있었는지 술이 약간 취한 선배 농군은 김정호 대표의 손을 잡고 볼멘소리로 뭔가 하소연을 하는 듯했다.
선후배 농군의 대화가 20여 분이나 지났을까? 선배 농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이었다. 시종일관 “예, 예, 형님.”하며 점잖게 고개만 끄덕이던 김정호 대표가 자원봉사단이 챙겨준 홍탁삼합(洪濁三合)을 선배 농군에게 권한다. “이거 먹고 힘내이소.” 손사래를 치던 선배 농군은 못이기는 척 후배가 내민 젓가락에 “아~”하고 입을 내민다.
방앗간을 찾을 때보다 훨씬 느긋해진 선배의 걸음에 발맞춰 느린 배웅을 마치고 돌아온 김정호 대표가 다시 불이 켜진 창고로 서둘러 뛰어 들어간다. 봉하의 가을이 보름달빛을 받아 맛나게 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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