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6. 10. 16:55ㆍ관심사
꽃이 사람보다 따뜻할 때
고재종
꽃이 사람보다 따뜻할 때가 있다.
유월까지 죽자사자 심어 놓은 모들이 뿌리를 잡아 한창 땅맛을 알기 시작하는 요즈음, 발자국 딛는 들길마다에 하얗게 일렁이는 개망초꽃이 사람보다 따뜻할 때가 있다. 꼭이 농부들의 땀방울 같은 모습으로 서리서리 피어 눈부시게 일렁이는 개망초꽃, 그 별 볼일 없는 들꽃이 조국보다 은혜로울 때가 있다.
4,5월의 자운영꽃, 6,7월의 개망초꽃, 10,11월의 들국화를 농부의 꽃이라고 명명한 적이 있다. 농부가 흘린 핏점 같은 자운영꽃, 땀방울 같은 개망초꽃, 눈물 방울 같은 들국화가 피와 땀과 눈물의 역사를 살아 온 이 땅 농부들의 화신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설문 조사에서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꽃이 무엇인냐는 물음에 장미꽃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가장 많았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폭염이 내리는 7월이면 새빨갛게 피어나는 정열의 빛깔 때문인지, 아니면 그 화사함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민족적 정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장미꽃이 어떻게 제일 좋아하는 꽃이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의식 있다는 사람들은 우리의 민족적 감정을 잘 나타내 주는 꽃으로 진달래를 꼽는다. 4월이면 이 나라 산이란 산마다 붉게붉게 타오르는 진달래는 그 한과 분노의 빛깔로 이 땅 민중들에게 확실히 호소력 있는 꽃이다. 그만큼 우리 민족은 한과 분노의 민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달래를 우리의 꽃으로 꼽고 있는 사람들도 한 가지 생각해야만 할 것이 있다. 진달래가 많은 산은 사실 헐벗은 산이다. 진달래는 관목과 꽃으로서 숲이 울울창창 들어선 곳에선 거의 피지 않는다. 우리 나라 산에 진달래가 많은 것은 아무래도 산의 토양이 척박하고, 더구나 일제 때 쓸 만한 나무들을 모두 베어 공출해 가 버려서 그 자리에 관목들이 들어찼기 때문으로 추정이 된다. 하지만 진달래에 관한 한, 우리 민족의 정서는 한과 분노의 부정적 정서임엔 틀림없다.
진달래도 좋지만, 우리 농부에겐 자운영꽃, 개망초꽃, 들국화가 훨씬 더 정감이 가고 의미 있게 보인다. 앞에서 말한 대로, 우선은 그 꽃들이 농부의 피와 땀과 눈물의 상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6,7월의 개망초꽃은 꽃으로는 볼품이 없는 꽃이다. 백색 혹은 옅은 자색의 두화가 방상 꽃차례로 피어나는데, 향기도 별로 없다. 더욱이 이 꽃은 북미가 원산의 귀화 식물이라는 얘기도 있다. 그런데도 개망초꽃이 좋은 이유는 그 수수함과 흔함과 생명력 때문이다. 농부들은 해마다 논두렁 풀을 베면서 그 꽃대를 무수히 잘래 낸다. 심지어는 그 풀들 때문에 제초제를 엄청나게 뿌려 대기도 한다. 그런데도 개망초꽃은 이 나라 이 들녘에서 꽃을 못 피워 본 적이없다. 그렇게 한여름 들판을 수놓는 참으로 흔하고 수수하면서도 질긴 생명력이다.
그러니 그 꽃은 영락없이 우리 농민의 모습과 닮았다. 역사 속의 숱한 고통과 소외 속에서도 끝내 이 땅의 농사를 지켜 낸 농민들의 모습 말이다. 그러면서도 제 존재를 화려하고 향기롭게 드러내지도 않고, 묵묵히 다시 이 땅의 밥을 생산해 내는 모습 말이다.
며칠 전에 그 개망초꽃 밭에 앉아 눈물을 떨구고 있는 동네 아주머니를 본 적이 있다. 이웃해 있는 논의 주인이었기에 다가가서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그 아주머니는 "꽃이 사람보다 따뜻할 때가 있어서 그러구만이라우." 하며 탄식을 해 대던 것이다.
사실인즉, 그 날은 하곡 공판날이어서 바깥 양반이 열 마지기 논에서 거둔 보리 30가마를 싣고 공판장에 나갔다. 한데, 느지막이 술에 취해 돌아와선, 돈 좀 내놓으라는 아주머니의 말에 호주머니에서 동전 몇 푼 달랑 내놓더라는 것이다. 물론 그 아주머니도 농협 빚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이 빚 가리고 저 빚 가리고 돌아온 줄 뻔히 알면서도, 동전 몇 푼 달랑 내보이는 남편을 보니 부아가 치밀어 공판한 돈 어디서 다 술 먹고 왔느냐고 애먼 소리를 내었더란다. 그라자 바깥 양반 역시 그렇잖아도 속이 상해 돌아왔는데, 여편네마저 바가지를 긁으니 생전 하지 않던 손찌검까지 해 대더라는 것이다. 결국 대판 싸움을 벌이고, 갈 데가 없어서 물꼬나 막으려니 하는 핑계로 논둑에 나오니, 거기 흐드러지게 개망초꽃이 피어 자기 대신 아픈 마음을 울어 주는 듯하여 그 꽃밭에 앉았다가는 것, 그 꽃밭에 않으니 얄팍한 여편네 속 하나 헤아려 주지 못하는 남편보다도 서울 간 일곱 자식들보다도 그 꽃이 더 따뜻해 보이고, 다정해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좀더 깊이 생각해 보니 죄는 역시 무지렁이 남편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 남편에게 뺨 몇 대 얻어맞는 것이 분한 것도 아니라, 그토록 뙤약볕에서 신경통 앓는 다리 이끌며 거둔 보리로 땡전 한 푼도 못 쥐어 보게 하는 현실이 원망스럽고, 그러니 입만 열면 선진 조국, 복지 농촌을 부르짖는 나라보다도 들녘에 무심히 보아 온 개망초꽃이 더욱 자기의 서로운 마음을 알아 주는 것 같고, 따뜻이 위로해 주는 것 같아 은혜롭게만 여겨지더라는 것이다.
그렇다. 그래서 말없는 꽃이 말 많은 세상보다도 더욱 은혜로울 때가 있다. 참으로 꽃을 꽃으로만 보아 장미꽃이나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 시대에, 꽃조차 자신의 삶의 고통과 설움으로 비쳐져 새롭게 보이는 농사꾼의 아픔. 그 아픔으로 말하건데, 꽃이 조국보다 은혜로울 때가 있다. 말없는 꽃이 말만 화려한 조국보다 더 은혜로울 때가 있다.
빚더니와 노인네들과 골병만이 득실거리는 농촌에 대고 입만 열면 새마을이니 복지 농촌 발전 대책이니 하는 화려한 구호만을 내뱉어 우리를 우롱할 뿐, 일국의 대통령 밑에 심각해질 대로 심각해진 농촌 농민 문제를 다룰 전문 보좌관 하나 두지 않고, 되려 어쩌다 못살겠다고 시위나 한번 하면 시위 농민을 폭도로나 몰아붙이는 조국, 선거 때만 되면 누구라 할 것 없이 농촌 발전에 관한 화려한 공약을 내세다가도, 당선이 되고 나면 그까짓 7백만 농민쯤이야 아랑곳 않고 권력 다툼에나 눈이 멀러 버리는 정치인들, 저농산물가와 농민의 값싼 노동력 제공 등 철처한 농민 희생 위에 기업을 성공시키고도, 농촌이 망해 가는 지경에서도 미국산 무공해 쌀을 미군 부대에서 빼다 먹고, 또한 각종 외국산 농축산물을 수입해다가 자기들의 돈벌이를 하는 데에만 급급한 재벌보다도 개망초꽃 한 송이가 천번 만번 은혜로울 때가 있다.
벼들이 땅맛 알아 한창 푸르러지고 새끼를 치는 들녘의 7월이면, 거기 논두렁에 소리도 없이 빛도 없이 무심히 피고 지는, 농부들의 눈물 방울 같은 개망초꽃이 훨씬 더 우리의 가슴을 위로해 줄 때가 있다.
▶ 고재종(1957~ )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다. 1984년 실천문학사의 신작 시집 '시여 무기여'에 '동구 밖 집 열두 식구'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시 쓰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시집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 '새벽들' '날랜 사랑'과 산문집 '쌀밥의 힘'을 펴냈다. 농사를 지으며 시를 쓰고 있다.
http://blog.naver.com/toamm/110006759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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