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2010년 여름 1

2010. 7. 30. 19:49정치

서울 2010년 여름 1
(서프라이즈 / 개곰 / 2010-07-30)


 

반포에서

 

구반포의 주공 아파트 단지는 현수막 천지였다. 재개발 추진위원장과 감사를 뽑는 선거가 있는 모양이었다. 재개발에 반대하는 주민도 꽤 있는 모양인지 "재개발 반대하는 주민 각성하라!"는 현수막도 나부꼈다. 살벌했다. 자기 이익과 직결된 문제에서는 사람은 당연히 집요하고 그악스러워진다. 그 자체를 탓할 일은 아니다. 서양 민주주의의 발전도 결국은 세금이든 임금이든 한푼이라도 더 쥐어짜려는 세력과 한푼이라도 덜 털리려는 세력이 기를 쓰고 싸운 각축전의 다른 이름이었다. 혁명이라는 피를 흘리지 않고 그 싸움에서 이기는 강력한 무기는 투표였다.

 

서양의 없는 사람들은 그 투표권을 따내려고 수백 년을 싸웠고 어렵게 따낸 투표권을 악착같이 써먹어서 자기들이 사는 사회를 사람이 살 만한 사회로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없는 사람들은 있는 사람들이 장악한 언론에 세뇌당해서 정작 자기들을 위해 싸워줄 정치인에게는 침을 뱉고 자기들을 쥐어짜낼 정치인에게 표를 던진다. 아니면 먹고 살기 힘들어서 아예 정치에서 등을 돌리고 투표를 하지 않는다. 반면 한국의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대변해줄 사람을 위해 악착같이 투표를 한다.

 

신반포의 지인이 사는 아파트는 얼마 전에 재개발로 들어선 고급 아파트였다. 비밀번호를 눌러야만 들어갈 수 있는 폐쇄적 시스템이야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지만 아파트 지하에는 헬스장부터 사우나, 골프연습장, 심지어 독서실까지 아파트 주민의 편의시설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 장을 보러 가거나 출근을 하는 것 말고는 굳이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어 보였다. 엘리베이터 안의 안내문을 보니 골프동호회, 바둑동호회는 물론이고 뮤지컬 같은 공연을 아파트 주민들이 같이 볼 수 있는 기회까지 주어지고 있었다. 학연이나 지연, 교회라는 기존의 끈 말고도 이런 식으로 상호 교류를 장려하는 거주 공간 형식을 통해 있는 사람들끼리의 공동체 의식은 더욱 굳건해지지 않을까. 없는 사람은 자꾸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있는 사람은 갈수록 찰흙처럼 똘똘 뭉치고…… 착잡하다.

 


강연장에서

 

한국미래발전연구원에서 김창호 전국정홍보처장의 강연을 들었다. 한국 진보의 앞날을 주제로 한 강의 내용도 훌륭했지만 김창호 처장의 냉정한 열정과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지성은 압권이었다. 김 처장이 자신을 포함한 한국의 진보 세력에게 주문한 내용은 세 가지였다. 

 

첫째, 전체의 줄기도 꿰뚫어야 하지만 세부에도 강해야 한다. 자기가 펼치려는 정책의 논리적 귀결을 끝까지 따져야 한다. 그러자면 높은 자리만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면서 거창한 정책, 거창한 비판을 하는 것보다 낮은 자리에서 미시적 정책, 미시적 비판을 하면서 고민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김 처창은 참여정부 사람들이 대거 하방하여 지방자치제의 버팀목이 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노무현 대통령에게 말씀드린 적이 있다고 한다. 이병완 비서실장이 괜히 광주의 구의원으로 내려간 게 아님을 알겠다. 노무현 대통령이 보좌관들에게 끼친 긍정적 영향만을 생각했는데 김 처장의 강연을 들으니 노무현 대통령에게 긍정적 영향을 끼친 보좌관들의 저력을 느낀다.

 

둘째, 진보 세력은 늘 자기네는 소수라는 의식을 버리고 주류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책임 의식으로 직결된다. 주류 의식이 없을 때는 깊은 생각 없이 비판만 하면 된다. 그러나 주류 의식이 있는 진보는 멀리 내다보고 정말로 오래 굴러갈 수 있는 제도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 사람들은 잃어버린 10년을 만든 장본인이라는 비난을 좌우에서 받았지만, 김 처장처럼 숲도 보고 나무도 보는 안목을 가졌고 또 책임 의식을 가진 정치인을 키워냈다는 점이야말로 지난 10년 민주 정부의 가장 값진 재산이 아닐까.

 

셋째,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공동체 의식을 지역 단위에서 만들어가야 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 방법 말고는 없다. 후보 경선에서 밀려나기는 했지만 김 처장이 성남시장 후보로 나선 것도 그래서리라. 절실히 공감한다. 하지만 있는 사람들의 학연, 지연, 아파트연으로 똘똘 뭉친 그 강고한 공동체 의식에 맞설 수 있는 시민의 공동체 의식을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 ……

 

김 처장은 지금 백수니까 언제든지 강연 초청을 해달라고 농담처럼 말한다. 국정홍보처가 없어지면서 국정브리핑을 만들던 인재들도 대부분 백수로 지내는 모양이다. 억장이 무너진다. 저렇게 이론과 실무에 동시에 능한 인재들이 작게라도, 온라인으로라도 언론을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 처장은 중앙일보 기자 출신이다. 프로가 만드는 언론과 아마추어가 만드는 언론은 같을 수가 없다. 참여정부 시절 조중동에서 김장수 국방장관을 꼿꼿장수라고 추켜세웠을 때 국무회의를 마치고 김 장관이 조중동에서 자기들 멋대로 쓴 거라고 어색하게 변명했을 때 김 처장은 정 그렇다면 정정 보도를 내라고 김 장관에게 다그쳤단다. 김 처장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조폭 언론과 조폭 언론에 굽신거리던 꼿꼿장수 같은 보신주의자에 대한 울분이 느껴진다. 강직한 사람이다. 머리와 가슴이 모두 살아 있는 노무현과의 사람이다. 강연이 끝나고 질문을 받는 시간에, 언론을 만드실 생각은 없으시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왜 그런 생각이 없겠는가. 그만한 돈이 없기 때문이고 괜히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일을 벌였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까봐 벌이지 못하는 것이리라. 잘 나가던 주류 자리를 집어던지고 좌우 주류 집단으로부터 돌팔매질을 받던 인간 노무현을 위해서 그만큼 희생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김 처장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다.

 


천호선 후보 개소식에서

 

5분 정도 늦긴 했지만 사무실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으로 꽉 찼다. 겨우 비집고 들어갔다. 이재정 국민참여당 대표, 한명숙 전 총리, 이기명 후원회장이 격려사를 해주었고 이상규 민주노동당 후보, 장상 민주당 후보도 덕담을 해주었다. 한명숙 서울 시장 후보를 위해서 민주당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뛰었던 이상규 후보도 시원시원하고 솔직담백한 연설이 인상적이었다.

 

천호선 후보가 연설을 한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지는 20년이 넘었지만 입후보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란다. 입후보할 기회가 왜 없었겠는가. 정치자영업자들은 틈만 나면 그런 기회를 덥석 낚아챈다. 그러나 천호선은 주인공이 되려고 정치판에 나선 것이 아니라 역사적 책임감에서 가시밭길을 택했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정치인으로 입후보하는 길을 피했으리라. 그러나 이번만큼은 도망갈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손을 벌리게 되었단다. 정치자영업자들은 "놀고 있네" 하면서 야유를 할지 모르지만 천호선 후보의 말은 에누리 없는 진심임을 나는 안다. 천호선 후보는 잘 나가고 싶어서 정치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불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감에서 노무현의 동지가 되었고 노무현이 떠난 뒤에는 노무현의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국민참여당을 만들었다. 고마움을 느낀다.

 

유시민 전 장관도 덕담을 해주었다. 장상 후보가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은 사촌지간이라고 했지만 유 장관은 사실은 민주노동당에게 더 친근감을 느낀단다. 유 장관의 말에서도 민주노동당에 대한 친밀감이 묻어난다. 한때 유 장관도 이해찬 전 총리와 함께 평민당에 몸을 담은 적이 있단다. 김대중 총재가 재야 세력에게 영국의 노동당이 자유민주당과 연대하여 실력을 키워 나중에 단독으로 집권한 것처럼 여러분도 평민당에 들어와서 실력을 키운 다음 나중에 살림을 따로 차려나가서 여러분의 뜻을 펼치시라, 하지만 지금은 우리를 좀 도와달라 하는 호소에 설득당하여 평민당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렇지만 결국 한국의 진보 세력은 실력을 키우는 데 실패했다고 유장관은 말한다. 한국의 주류 진보 세력으로부터는 진보를 말아먹었다고 그렇게 욕을 먹었지만 유장관이 진심으로 자신을 진보 정치인으로 생각함을 알겠다.

 

노무현의 사람들이 생각한 진보는 도대체 무엇일까? <<운명이다>>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현대자동차 구내식당에서 일하던 수백 명의 아주머니들이 노무현 당시 국회의원에게 현대자동차로 책임지고 복직시켜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회사는 구내식당의 운영권을 노조에게 넘겨주었다. 결국 힘 있는 노동자가 힘 없는 노동자를 착취한 것이다. 그러나 힘 없는 노동자는 힘 있는 노동자에게 따지지 못하고 애꿎게 노무현을 성토했다. 한국의 보수가 자본가 옹호 일변도로 기울었다면 한국의 진보는 노동자 옹호 일변도로 기울었다. 노무현은 노동자건 자본가건 부당한 반칙과 특권을 없애나가면서 기회를 공정하게 보장하는 것이 정말로 오래 굴러가는 진보 체제라고 믿었으리라. 그래서 노무현은 결국, 자본가는 사기를 치건 거짓말을 하건 무조건 감싸면서 노동자는 쥐어짜려고 생각하는 한국 보수한테서 뭇매를 맞았고, 노동자는 같은 노동자를 등쳐먹어도 무조건 감싸고 정작 자기들이야말로 자본의 힘 앞에서 꼼짝도 못하면서 한국이 자본주의 체제의 일부분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나라를 이끌려는 정치 세력에게는 신자유주의의 앞잡이라고 호통을 쳐대는 한국 진보에게 짓이겨졌다. 민주노동당은 선거 연대를 앞장서서 실천에 옮기고 많은 희생과 양보를 했지만 민주노동당이 혼자서 끌어낼 수 없는 정치 세력은 엄존한다. 그런 세력을 대변하는 것이 국민참여당이다. 언젠가 민주노동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노동자를 배신한 사이비 세력 운운하면서 민주노동당 집권 세력을 무조건 매도하는 진보 꼴통 세력은 반드시 나타난다. 강조점은 다를지 몰라도 진정으로 공동체의 가치를 추구하는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이 쌍두마차로 한국 정치를 주도할 날이 빨리 와야 한다.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밝다. 기운이 솟는다. 기득권자들의 끈끈한 집단 이익 결속망에 어떻게 맞설 수 있을지 막막했는데 개소식에 모인 사람들의 환한 얼굴을 보니 용기가 난다. 영국에서 모난돌 회원들이 모은 돈을 후원금으로 내고 사무실을 나선다. 희망은 책상 앞에 앉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겯은 어깨에서 나오는 것임을 개소식에 모인 사람들의 활달한 몸짓과 자신에 찬 얼굴에서 배운다.


(cL) 개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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